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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2. 2020

도중도(島中島)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곳

섬 중에 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산 도중도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광헌당이 자리하고 있다.  광현당(光顯堂)은 ‘빛이 나타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집의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빛이 나타난다는 의미의 집은 도중도교를 건너가면 만나볼 수 있다. 실제 이곳의 지형을 보면 대치천과 호곡천이 싸고도는 형태의 섬의 지형이다. 

몇 년 전에 와보고 오래간만에 도중도를 찾아가 보았다. 이날은 비가 적지 않게 내렸는데 여름 비가 도중도를 적시고 있었다. 윤봉길의 집안은 몰락 양반가로 전형적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비롯하여 국사와 신학문을 배운 윤봉길은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하여 계몽을 시도하였다. 

윤봉길이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걸었으나 광복의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이 되고 나서 18년이 지난 1918년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이흑룡(李黑龍)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 전선의 형세를 듣는 것을 계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지금도 도중도는 풍광이 좋은 곳으로 광헌당외에 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도중도에는 부흥원이라는 건물도 있는데 이곳에서 윤봉길은 야학을 가르쳤다.  문맹퇴치의 일환으로 협소한 저한당의 사랑방에서 운영해오던 야학당의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넓은 공간의 야학당을 건립하여 체계적인 야학과 농촌 부흥운동 등 다발적인 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다. 


초가집이지만 앞에 공간이 여유가 있어서 마음만은 넉넉해지는 곳이다.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윤봉길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옛날의 집들은 모두 처마가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도 대청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일제강점기에 계몽에 몸을 던졌으며 민족차별에 반대하였던 윤봉길은 결국 목숨을 버리며 항거를 하였다. 

도중도를 감싸고 흐르는 대치천, 장곡천, 잉화달천, 지천 등이 칠갑산에서 시작해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칠갑산은 차령 끝자락인데 충남 중심부에서 가장 높다.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시리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힌 윤봉길은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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