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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8. 2020

자신의 역할

해동의사운강이선생강년지비(海東義士雲岡李先生康秊之碑)

코로나19속에서도 이념, 이해관계를 다른 것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을 TV에서 본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해관계속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아닌척을 한다. 건강과 경제의 경계선상에서 어떤 쪽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윗사람이 무엇을 좋아한다면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좇아 그것을 더 좋아하게 되는 법이라고 한다. 

문경에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는 운강 이강년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08년이다. 경북 문경군(聞慶郡) 가북면(加北面) 도태리(道胎里, 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 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이 바로 그 생가다. 이강년의 가문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7대조 이세형(李世亨)은 우암 송시열이 복제(服制) 문제로 유배 갈 때 상소를 올려 그를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히는 변무(辨誣)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이강년의 성장기는 밝혀진 것이 많이 없으나 조부 이덕의(李德儀)와 학자로 숙성했던 부친, 삭주부사를 지낸 백부 등의 가세로 보아 학문을 숭상하는 가풍에서 유학을 배운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생가의 한 켠에는 운강 이강년 선생의 비가 세워져 있다. 공자는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고 하였다. 전통적인 유교 관념에 따른 충군애국 정신도 견지하고 있었던 운강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나 항일전을 전개하는 동안 각지 주민들의 보호에 깊은 애착을 보이며 민폐를 제거하였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타성에 젖어 무사안일의 관망적 자세를 보이던 양반 권세가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이들이 일제 침략세력과 결탁함으로써 민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간주했던 사람이 운강 이강년이었다. 

지금도 문경의 곳곳에는 운강 이강년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태리에서 태어난 운강 선생은 서울 전쟁기념관에 이순신, 을지문덕, 강감찬 장군 등과 함께 대한민국 의병장으로는 유일하게 흉상이 모셔져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운강 선생은 일본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의 순국 사형수 1호이기도 하다. 

1907년 9월에는 이강년(李康年) 의병장 휘하 의병장으로 풍기, 봉화, 문경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는데 함께 했던 장윤덕 의사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07년 4월 서울에 상경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매국 적신(賣國賊臣)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했지만 2년 뒤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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