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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1. 2020

참배 (參拜)

불정면의 정인지와 이연경

조상의 묘를 참배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올해는 친인척이 모두 모여 참배하는 것도 벌초를 하는 것도 지양되고 있다. 특히 조상중에서 큰 공을 세웠다던가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이 있는 경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렇지만 올해는 그런 가문의 행사는 대부분 축소 운영되던가 개별로 진행하고 있다. 괴산의 불정면에 가면 정인지와 이연경의 묘가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면 세종시대에 특히 특출 난 인재들이 많았다. 아마도 왕의 역량에 따라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왕이 뛰어났을 때 능력 있는 재상이나 기술자들도 많았다. 세종대에는 많은 인재가 있었지만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거두었으면서도 이후의 행적 때문에 세인들에게 평가절하되었던 인물이 정인지가 있다. 

묘소의 크기로 보건대 그 어떤 조선시대의 재상보다도 그 규모가 남다르다.  세종 대 중반 경복궁과 왕릉에 관련된 풍수 논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는 어린 단종의 보위를 부탁한 세종의 유명을 외면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세조 말기에 조정에 나온 사림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길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느 순간에 갈림길이 나온다. 김효정과 함께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자 세종의 뜻을 받들어 신숙주, 성삼문,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는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자수성가했지만 재산을 불리는 데 전념하여 존경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적지 않은 지탄을 받기도 했었다. 

정인지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연경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연경의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64번지 선산에 있는데 묘비는 퇴계 이황이 지었다고 한다. 평소 조광조와의 친분으로 얼마 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숙청될 때 연루되었으나 중종이 찬인록(竄人錄)에서 이연경의 이름을 지워주면서 유배는 가지 않았다. 

기묘사화 이후 충주로 낙향하여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면서 학문 도야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학문을 함에 있어 누추한 세속을 탈피하고 고명함에 마음을 두었으며 사서(四書)를 도(道)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았다고 한다. 

계단으로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 보니 선산이라서 여러 사람의 묘가 있는데 모두 조선시대에 적지 않은 벼슬을 했던 모양인지 비문을 비롯하여 문인석이나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 묘가 여러곳이 보였다. 

이연경은 1548년(명종 3) 64세의 나이로 별세했는데 시호는 정효(貞孝)이며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팔봉서원에 제향 되었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속세의 잡념을 씻어 버리고 마음을 맑게 한 뒤에라야 거의 도(道)에 들어가는 방향을 알아서 소인이나 금수의 구덩이에 떨어짐을 면하게 되리라.” - 이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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