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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20. 2020

명량 (鳴梁)

이순신을 도와 승리를 만든 안위

유속이 11.5노트이고, 수심은 19m이며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하여 바닷 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부르는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의 해협을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12척의 병선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오늘날 명량대첩이라고 부르고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전투를 할 때 가장 최선의 방법은 적은 힘을 들여서 상대를 분주하게 만드는 데 있다. 지형지세를 이용하는 것이나 적의 약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정작 중요한 것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훈(大勳). 정여립(鄭汝立)의 5촌 조카인 안위는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한다. 

1563년 전라도 김제군(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에서 태어난 안위는 정여립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김제 금구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서 그곳에서 살았던 정여립을 쓴 적이 있다. 정여립은 전주의 문벌이 좋은 집안의 아들로 그는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으며 촉망받는 선비였다.

위기가 기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안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와 별장이 있는 금구로 집을 옮기고,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학문을 익히며 여러 사람과 어울렸던 정여립은 정치적인 희생양에 불과했다.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한 안위 장군의 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종하기 위해 지금의 논산지역인 은진에 머물다가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 향년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에게는 13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말을 하면서 중과부적의 적군을 맞이했던 이순신의 휘하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원균의 칠전량 해전 이후의 다 무너져버린 해군 상황과 당시 명량전의 절망적인 전력차에 휘하 무장들이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호통으로 가장 처음 움직인 사람이 바로 안위였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한 전공이 이순신의 장계 덕분에 널리 알려져 선조 31년(1598)에 전라 우수사로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되었다. 

1605년 충청수사로 재기용되고 이듬해 경상좌수사, 1612년(광해군 4) 포도가대장(捕盜假大將: 임시 포도대장)이 되었던 안위는 현재 김제의 학당사에 제향 되어 있다. 

명량에서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제외하고는 12척의 배 모두 뒤로 빠져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후 이순신의 대장선 1척으로 일본을 상대로 분투하던 중 초요기를 올려 다른 함선을 부를 때 가장 먼저 이순신을 도우러 왔던 안위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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