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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26. 2020

학문의 생명

변화하고 발전해야 쓸모가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행해야 하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를 가르치던가 글을 쓰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그런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리를 유지하려고 할 때 적폐가 되어가는 것이다. 1543년(중종 38)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되어 1677년 복원하여 서당, 종회소로 활용되다가 1868년(고종 5) 중건된 구미의 대월재는 바로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서 따온 것이다. 

새로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 단지 앞에 자리한 대월재는 조선 전기의 명신이며 청백리였던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 1509~1570)이 강학 공간으로 마련한 건물이다. 고려시대의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신당 정붕, 송당 박영, 김취성·박운·김취문으로 전승된 것이 바로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이다. 

공자 이후 이어져 내려오는 유학은 경전에 주석을 붙이는 생명력 없는 학문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즉 살아 있는 학문이 아니라 죽어 있는 학문으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변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으로도 불리는 주자학은 젊은 지식층이었던 사대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고려말, 조선시대까지 정신적인 기둥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았다. 주자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일 중 으뜸을 꼽으라면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주자학(朱子學)을 완성시켰으며  개인 수양으로서의 학문, 천하를 다스리는 기틀이 되는 학문, 인간 본성을 고민하는 학문으로 재탄생시켰다. 

건물의 대부분은 최근에 지어져서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잘 정리되었지만 오래된 그런 고택 같은 느낌이 없는 것이 약간 아쉽게 느껴진다. 

저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볼 수 있는 대월재는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깔고 방주를 세운 무익공계의 건물인데 기단의 상부는 시멘트 몰탈로 마감해 놓았다.

주자는 '수신제가(修身齊家)'등을 주장해 황제였던 효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당시의 파당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이후  당시 세력가였던 한탁주(韓侂胄)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그의 미움을 사 파직당했고, 그 이후 계속해서 탄압을 받아 불우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왔던 대월재의 앞에 새롭게 들어선 구미의 아파트 단지는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대월재의 상부구조는 내외주 기둥 위에 대량을 놓고 대량 위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얹었고 마루 형식의 툇마루는 조선 후기 상류 주거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평면구성 형태이다. 기득권이며 세력가였던 한탁주를 비판한 후 주자의 주자학을 위학(僞學, 정도에 어긋나는 학문)으로 매도하고 주희의 사상과 저서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는데 제자들을 옥에 가두는 등 옥고를 치르는 것을 보고 후학을 가르치며 주자는 말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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