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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8. 2021

인생 역경

토정 이지함이 겪은 이야기들

호서지방(湖西地方)이며 투표를 할 때도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고 할 정도로 중립적인 성향을 가진 곳이 충청도다.  ‘충청’은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 지명으로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은 예로부터 지명의 하나로 사용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역모에 의해 바뀐 적은 있었다. 조선 시대에, ‘충청도’를 달리 이르던 말. 충청도에 속한 충청북도 지역의 청주(淸州)와 충청남도 현재 홍성인 홍주(洪州)에서 따온 적이 있는데 이때 오래 부르지는 않았지만 청홍도라고 불렀었다. 이 때는 문정왕후가 집권을 했을 때로 권세가였던 윤원형의 시대였다. 그 윤원형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 이 씨 왕조의 이정랑도 포함이 된다.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와 율곡, 남명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이색의 6 세손이며 조카 이산해가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사람이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4세, 16세에 부모를 연이어 여의었다. 이후 형이지번을 따라 서울에 옮겨와 성장했는데 이 씨 왕조 집안의 딸과 결혼했으나 윤원형에 의해 역모에 몰려 죽게 된다. 장인 이정랑은 능지처참형에 처해졌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도 삭제가 된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지였던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며 충청도의 이름이 바뀌게 된다. 

32세에 겪은 처가의 역모사건으로 인해 토정 이지함은 부인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은 데다 과거 길이 막히면서 20여 년을 방랑하게 된다. 25년이 지났을 때 50대가 훌쩍 넘어 57세의 나이에 재야의 탁행지사 천거로 1573년 포천 현감에 부임했다가 1년 후 직에서 내려왔다. 5년 후인 1578(선조 11)년에 아산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3개월 만에 갑작스러운 병환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애민정신이 있었지만 방랑하면서 그 생각은 더 깊어진 듯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아산 현감 부임 직후 백성들이 왕실에 물고기를 보내기 위해 정식 부역 절차도 없이 수시로 고기잡이에 동원돼 고통이 크다는 소리를 듣고 즉시 그 양어장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밑바닥이 새는 잔은 드넓은 서해의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다고 한다. 그 당시 기득권 계층인 양반과 사대부 관료들이 기존 질서에 안주하면서 변화나 개혁을 원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토정 이지함처럼 경험과 지식이 있지 않다면 정치인에게 탁월한 통찰력이 있지 않는 이상 사회의 본질을 바라볼 수가 없다. 보령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바다를 중시하는 이러한 실용주의 사상이 있었으나 그의 생각은 실천될 수 없었다. 


노블레스 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실가의 혼인까지 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살았지만 마지막까지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던 사람이 토정 이지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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