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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8. 2021

사람 살던 공간

당진 황무실 성지

자식에게 기대며 노후를 보장받았던 시대는 빠르게 저물었고 이제 자신의 삶은 직접 책임져야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평균수명조차 늘어서 옛날보다 훨씬 더 오랜 경제활동을 영위해야 한다. 20여 년 전 IMF로 대한민국은 안정된 고용의 가치관이 180도 바뀌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 19에 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실제로 IMF가 끝난 이후 몇 년간 출생률이 줄어들었는데 코로나 19 이후에는 그보다 더 급속하게 출생률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2020년의 국내 주민등록 인구는 5182만 9023명으로 2019년보다 2만 838명(0.04%) 감소했다. 2만이면 군 단위가 하나가 없어지는 정도의 큰 변화다. 

생각보다 빠른 변화가 예상이 된다. 약 235년 전인 1785년에는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원시원한 풍광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지만 내포 지역에 볶음이 전해진 직후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한반도에 자리한 오래된 교우촌 중 한 곳이다. 

1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했던 황무실 교우촌은 박해 중에 숨어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식처였는데 이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랑드르(Landre) 신부가 각각 1857년과 1863년에 병으로 선종하여 묻혔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을 뒤로 돌려보면 100년의 변화보다 어떻게 보면 지금 20년의 변화가 더 빨라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본인의 삶은 본인이 챙겨야 하며 삶의 양극화는 더 심화될 듯하다. 이곳에 조성되었던 황무실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로 붕괴되어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황무실 성지가 교구 성지로 보존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박해시기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황무실(합덕읍 석우리 1013 일원)을 교구 성지로 선포하고, 성지 순례지로서 보존한 것인데 프랑스 선교사로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 위앵 민루카(1836~1866) 신부의 은거지였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스승이었던 매스트르(1808∼1857) 신부와 랑드르(1828∼1863) 신부의 사목 근거지가 이곳이었다. 

오래전에는 사람 살던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도 바뀐다.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 4m 높이 자연석으로 순교자 현양비를 세워 순교자들을 기리고 성지 복원을 본격화하면서 보존된 황무 실성 지는 대규모로 개발하기보다는 소박하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신앙의 의미를 새기며 기도할 수 있는 성지로 가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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