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듯이 찾아간 곳의 수류성당
모악산 자락의 천오백 년의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는 금산사와 호남 천주교 장착의 역사를 담고 있는 김제시는 전라북도에서 중심이 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코로나 19 방역은 누군가의 신념의 자유를 포기하며 균형점을 찾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념이 있고 걸어가고 싶은 길이 있다. 현재 김제의 수류성당은 코로나 19가 잠잠해질 때까지 미사를 올리고 있지 않고 있었다. 먼저 언급한 모악산 종교 순례길은 김제시 금구면 산동 교회에서 시작해 귀신사~금산사~금산교회~증산 법종교~대순진리 회당~원불교 원평교당~수류성당을 연결하며 40㎞를 물 흐르듯이 걸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김제의 모악산은 조금 특이한 곳이다.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신흥 민족종교의 발원지를 포함하여 불교(금산사)·원불교(원평교당)·천주교(수류성당)·기독교(금산교회) 등 여러 종교문화 시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다.
김제 수류성당의 원래 이름은 배재 성당이었다. 대전에 있는 그 대학교와 연관은 없다. 호남 천주교의 시작점이기도 한 이 지역은 1888년 6월 전라도 지역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M. E. P.)의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는 고산 빼재공소(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의 秀峙)에 거처하다가 배재성당을 설립하였다. 이곳으로 옮기게 된 것은 1895년 5월로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마르첼로) 신부가 그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10월 초 금구 배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금구현 수류면(水流面) 상화리(上禾里, 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지금은 석조로 만들어진 성당이지만 이곳으로 옮기고 수류성당으로 개칭한 후 1906년 초부터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1907년 10월 1일 한옥 목조 성당(48칸)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9월 24일 성당이 전소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수류성당은 휴전 후 수류성당 신자들이 구호물자를 적립해 성당 신축 경비를 마련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제대로 된 자원이 없었을 때 이곳에서 가까운 냇가에 가서 신자들이 모래와 자갈을 채취해와 벽돌을 만들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기에 지역공동체의 힘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류성당은 호남 천주교의 산지이자 수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곳이라고 한다. 수류성당 앞에 있는 종이라도 쳐볼까란 생각으로 걸어서 올라와본다. 태양광선에 의해 생성되는 비타민D는 확실히 뼈에 도움이 된다. 몸이 골골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에 태양빛을 어느 정도는 반겨주어야 할 듯하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안 해봤던 것을 하고 보지 못했던 것을 찾고 그 속에서 특별함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관광지들은 위축되고 관광도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를 위한 대규모 패키지 형태에서 벗어나 비대면, 소규모 패턴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특별함의 가치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