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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19. 2021

수신제가(修身齊家)

음성에 자리한 김세필의 지천 서원

조선시대에는 공신들이 참 많았다. 왕자를 도와 공신에 오른 사람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이 공신에 올랐지만 무엇보다도 반정공신의 위세는 남달랐다. 그만큼 폐해가 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엄청난 혜택과 함께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던 공신 아닌 공신들도 많았다. 그 기반에는 반정으로 인해 정통성이 없는 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는 조광조라는 구부러지지 않는 유학자가 있었다. 

일명 반정공신을 내세우며 훈구대신들에게 휘둘리던 중종은 내심 조광조의 개혁이 반가웠지만 적지 않은 부담이 있었다. 중종이 아직까지 조선왕조를 위한 수신제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입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종을 압박하면서 변화를 요구하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인해 사사(賜死: 극형에 처할 죄인을 왕명으로 독약을 마셔서 죽게 하는 일)가 된다. 이때 기묘사화가 잘못되었음을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당했던 김세필이라는 사람이 있다. 

음성의 지천서원은 김세필이 그 이후로 은거하며 살면서 공자당을 건립하였던 곳이다. 지천서원은 정조 24년인 1800년에 중건하였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에 내린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기도 했다.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가야 두 채의 건물을 만나볼 수 있다. 지천서원의 사우에는 십청헌 김세필을 비롯해 모두 8분을 모시고 있는데 그중에 박상은 이행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 외에도 남곡 김의, 추곡 김정현, 학주 김흥욱, 성남 김종현 등을 제향하고 있다. 

연산군 때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던 김세필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홍문관 응교로 기용된 뒤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기도 했었다. 일반적인 서원의 형태와는 조금 다르다.  돌계단 위에는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는 솟을대문이 서 있는데 앞에는 경모문(景慕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유배를 떠났다가 1522년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공자당은 그 형태가 '공(工 )'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벼슬에서 멀어지기로 생각한 김세필은 이곳 말머리에 입향하여 공자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 시초가 되어 지천서원이 창건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과 주변을 살펴봐도 수신제가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은 조광조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그 결과 김세필은 벼슬의 뜻을 버렸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당대의 기득권 세력과 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더가 제대로 된 수신제가없다면 그 기세 등등한 기득권과의 세력다툼에서 너무 바른길을 보여주는 사람은 희생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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