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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8. 2021

반려동물

이기적인 마음은 필터링할 수 없다. 

어릴 때 개나 고양이를 키웠던 기억이 난다. 단독주택에서 키웠는데 나름의 행동반경을 보장(?)해주었다. 대문은 닫아놓았지만 묶어놓고 키우지는 않았다. 지금도 동물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단지 키울 주제(?)가 되지 않기에 키우지 않을 뿐이다. 그 특유의 냄새도 좋아하지도 않고 혼자 몸을 챙기기도 힘든데 어떤 대상의 뒤처리 가지 감당하지 못하다는 자신을 알 뿐이다. 즉 반려동물은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었을 때 공존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개나 고양이의 행동반경은 정말 넓다. 사람은 의지에 따라 행동반경을 축소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 동물들은 본능이 더 앞선다. 그 동물들을 좁은 집안에 가두어놓고 자신의 외로움이나 만족에 의해 키우는 것이 인간들이다. 본능을 억지로 누르면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그 존재들이 꼬리 치고 안기고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각종 SNS에 올린다.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대상을 동물에서 찾아놓고 좋아한다는 것으로 포장하면서 딸, 아들이네 하면서 매우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그 존재들이 좋아할까? 같은 종을 만나지 못하고 축소된 행동반경 속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 견생 혹은 묘생이 원하는 것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놓고 개나 고양이를 난폭하게 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런 사람들보다는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 동물이 희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TV를 잘 보지는 않지만 동물을 다룬 프로에서 대부분은 먹을 것을 가지고 동물을 훈련시키는 것을 본다. 사람들에 의해 잘 조련된 혹은 고분고분한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다. 너무 크지도 않고 식량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혐오스럽지 않은 외모를 가진 반려동물은 그냥 사람들의 부족한(연인, 만족이 되지 않은 반려자 혹은 아들딸?) 부분을 채워주는 희생양의 다른 모습이다. 동물들은 그 비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씩 밖에 데려가서 산책해주는 것에 만족해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살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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