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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22. 2021

정치소신 (政治所信)

청양 채제공의 상의사

조선대 영조와 정조시대 명재상이었으며 정치소신으로 대신들을 이끌었던 채제공(1720년~1799)은 사팔뜨기였지만 영의정까지 올라 정조 때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채제공은 올바른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개의치 않았던 사람이다. 영조대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에 이르게 될 때까지 그의 보호에 앞섰던 사람이다. 당대 가장 큰 정치세력인 노론에 맞서 그를 보호했기에 사도세자의 보호에 앞장선 것이 인정돼 정조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상의사를 찾아간 날은 유달리 더운 날이었다. 겉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 땀이 날 정도였는데 이제 봄이 모두 사라지고 여름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상의사에 모셔진 채제공은 정승의 반열에 올랐을 때 어린 시절 겪은 가난을 잊지 않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고안했던 사람이다. 보통은 올챙이 적 기억을 잊어버리는데 그는 역법의 시행 실태를 조사하고 이로 인한 폐단과 시정안을 진언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보통 대세에 그냥 묻어가려고 하는 편이거나 차라리 침묵을 선택했지만 그는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정치소신을 그대로 행하였다. 영조대에도 사도세자를 옹호했지만  정조대에도 가장 아픈 부위였던 사도세자의 문제를 거론하여 그의 아픔을 치유해주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이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 쪽에 의해 탄핵당하게 된다. 

채제공은 오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신해통공, 이조 전랑 통청권 혁파, 수원 성역 등 개혁 정책을 실행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금난전권을 폐지해야 된다는 것을 건의한 것이다.  정조대에 당시 기득권을 이루고 있던 노론 벽파의 ‘돈 줄’ 역할을 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신해통공(육의전을 제외한 각 시전의 금난전권을 금지시킨 조치)’을 시행하는 데는 꼬박 3년이 걸렸다. 기득권의 세력에 평민이 장사를 할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은 결국 민생개혁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 외에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을 듯하다. 이곳에도 초상이 있지만 채제공의 후손들은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 등 1854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수원 화성 축성(築城) 당시 총리대신(조선 말기 최고위 관직)을 맡아 축성을 총괄하는 등 수원과는 인연이 깊은 역사적 인물이었던 채제공의 흔적이 청양 상의사에도 있다. 

채제공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상의사에는 보물 제1477호 번암 채제공 선생(1720∼1799) 영정을 소장하고 있다. 정조 23년 1월, 정조 시대를 떠받쳤던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18일에 눈을 감았다. 이로서 정조의 훌륭했던 정치동지는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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