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아이덴티티
잠시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로 가서 시원한 물을 떠 왔다.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지금의 그녀의 모습과 미래의 어떤 모습을 꿈꾸면서 살아가는지 묻고 싶어 졌다. 생각해보니 나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을 위해 살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직 거기에 있어요?"
"예 지금 책을 정리하면서 이것저것을 하고 있었어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의 제목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저도 읽어보긴 했어요. 저는 사람은 일생동안 삶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아이덴티티를 찾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찾기도 하는 것이죠."
"아이덴티티라면 본 아이덴티티가 먼저 생각나는데요."
"본 아이덴티티도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잖아요. 액션으로 그려져서 그렇지 자신의 내면을 보는 작품으로 맷 데이먼이 연기했던 리플리라는 영화도 한 번 봐보세요. 무려 리플리 증후군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캐릭터, 원작 소설의 주인공 리플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을 다룬 영화예요."
"그런 영화도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것이라면 어떤 사람처럼 되는 것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이라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과대포장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동경의 대상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상처가 크고 자존감 없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경하는 것은 많이 보아왔다.
"그럼 살면서 힘들다고 생각할 때는 있었어요?"
"저도 힘든 시간이 있죠. 그렇지만 저는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 과정 속에서 삶에 고난을 이겨내기도 하는데 그 힘은 유아동기에 사랑을 받았던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오르듯이 이겨낸다고 해요. 사랑의 샘물이 얕을수록 물이 부족해서 갈증을 겪듯이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도 때론 심각하지는 않지만 리플리 증후군을 느껴본 적도 있었어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명품에 대한 욕구나 무언가를 소유함으로 채우려고 하는 거죠. 마음속의 에너지원을 잘 관리하고 사랑의 샘물이 솟아나듯이 살아가려면 마음 챙김이 필요하다고 해요."
"글 쓰는 사람은 그런 걸 잘 관리해야겠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경리 작가처럼 힘들 때 어릴 때의 추억을 계속 꺼내면서 사용해야 되지 않을까요."
"부러워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길 같아요."
"저도 아직은 몰라요. 사람마다의 인생은 다르니까요.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이 대화를 끝으로 그녀와의 연결이 끊겨버렸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이지만 함께 사는 인생의 반려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인격적 관계이자 운명 공동체 같은 것이다. 그녀의 미래 반려자가 궁금해졌다. 반려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금까지 없었던 용기를 내고 각오를 다져 상대방 속으로 뛰어들어 애써 노력한 뒤 간신히 강을 헤엄치고 그 나무를 올랐을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분명히 그렇게 현명한 그녀라면 좋은 반려자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안의 샘물처럼 물을 길어 오르듯이 삶은 산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면서 가져온 물을 모두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