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인격
그러고 보니 그녀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래된 라디오 너머로 다른 여자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를 잊고 있었다. 인생은 원래 고독한 존재이며 그것을 잊는 순간 약해진다고 한다. 사랑에 인격이 있다면 잠시 생기기도 하고 오랜 시간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인격체는 사람이 살아갈 원동력을 주기도 하는 존재다. 분명한 건 사랑은 인간의 인내심이 강해질 수 있는 더없는 기회이며 내면의 힘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이다. 이제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방금 볶은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렸다.
자꾸 주변에서 잡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 방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정말 묘하다. 시간의 흐름이나 시간을 통한 인간의 진보는 환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보통은 인생에서 한정된 시간을 바꾸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인 가치와 교환한다. 그때였다.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순간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라디오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죠? 보통 라디오는 단방향이 아닌가요. HAM 같은 것도 아닌데 신기하네요."
"그런데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요?"
"저도 아는 목소리하고 정말 비슷해요." 정말 아는 여자와 목소리가 너무 비슷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여자의 목소리이며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혹시 연수니?"
"성호 오빠야? 그동안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되었어? 얼마나 오빠를 찾았는지 알아?" 집에 그냥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나를 생각해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데?"
"40일도 넘었어. 그래서 수소문도 했는데 연락이 안돼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데."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폰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 마지막으로 대화한 것이 쓰던 소설 교정 맡긴다고 했던 것 같아."
"그래 맞아. 이제 교정하고 표지 일러스트레이터 작업도 다 끝나서 출간하려고 준비 중이야."
"책 제목이 뭐라고 했었지? 아~ 장미의 여자였던 것으로 기억해. 제목은 그대로 사용하는 거야?"
"응 그대로 사용하려고 편집자 하고도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괜찮을 것 같대. 그런데 오빠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찾아갈게."
그러고 보니 원룸에 있다는 것만 기억할 뿐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한 것은 기억하지만 그것이 실제 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3년 전쯤에 만나 좋은 관계로 진전된 여성이었다. 문학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출판사와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면서 꾸준하게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었다. 같은 연령대의 여자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연수야. 우선 오빠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책이 많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룸이야. 지금 연수랑 대화는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라디오로 하고 있어."
"신기하다. 오빠를 그렇게 찾을 때는 찾을 수 없다가 갑작스럽게 이렇게 라디오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잘 납득은 되지 않는데 너무 고맙고 반가워."
"우선 책 출간은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못해본 것 같아."
"고마워 오빠. 나도 오빠를 사랑해." 그녀의 긴 속눈썹은 하늘하늘했던 그 기억이 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사랑이란 사람이 계속 살아가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연료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도 생각났다.
"연수는 정말 시적인 표현을 잘했는데. 아~ 그리고 아까 전에 어떤 대학생 하고도 이야기했는데 그 여학생도 연수처럼 말을 잘하더라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는 말이야?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네."
"그녀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삶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을 했었어. 톨스토이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고 의미가 있는 대화였어."
"신기하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그래도 오빠에게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책이 처음 나오면 오빠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거든."
"나도 궁금했어. 처음에 연수가 콘셉트를 말해주었을 때 많은 관심이 있었거든."
그녀와 이야기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지만 너무 현실적이었으며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은 상대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며 자신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주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애착을 느끼는 동물이라고 한다. 그녀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오래간만에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 감정을 느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