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가문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는 정기룡의 흔적

과거나 지금이나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출신 가문이나 학벌이 좋지 않다면 인정받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운과 때가 모두 잘 맞고 능력이 있으며 성과를 이룬 극소수의 사람들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 출신 가문이 좋지 않은 엄청난 사람들 중에 주목받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다. 하동에서 태어난 정기룡 장군도 60전 60승 불패의 신화를 남겼지만 출신 가문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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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 가면 임진왜란 당시 역사적 기록으로 전해지는 장군의 위대한 업적인 ‘상주성 탈환 전투’와 ‘용화동 전투’ 장면을 그린 전승을 올린 정기룡 장군 유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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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에 그는 병마절도사를 다섯 번, 삼도수군통제사를 세 번이나 맡았을 정도로 조정의 신임이 지대한 조선군의 최상층 지휘관이었지만 그의 공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출신이 미천하였고, 당시 권력의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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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태어나 1622년(광해군 14)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친 정기룡 장군은 곤양 정 씨의 시조다. 1586년에 무과에 급제했기에 임진왜란 당시에 참전을 했는데 당시 세운 전공에 대해서는 해전의 이순신(李舜臣)에 견주어 ‘육상의 이순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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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왔다. 개개인으로 큰 꿈을 꾸지 않았다면 출신 가문의 보이지 않은 큰 벽을 느낄 수가 없다. 그나마 정기룡 장군은 24세가 되던 해에 진주의 향리 강세정(姜世鼎)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인 강세정은 당시 진주에서 가장 부유한 향리였기에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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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의 삶을 보면 남자가 능력이 있으면 보통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처가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혼맥은 지금도 많은 케이스로 찾아볼 수 있다.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 속에는 그의 신분을 낮은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도 많지만 특히 후원자로서의 부인 이야기가 적지 않게 언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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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대로만 대접받는 세상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면 소성의 성과는 올릴 수 있다. 정기룡은 목민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목민심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수령은 모름지기 대학(大學)에서 이르는 바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을 배우는 데 힘써 수령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치민(治民)하는 것이 곧 목민하는 것임을 알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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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조정에서 이순신(李舜臣)을 위하여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설치하여 수군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뒤에 공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그 직임에 있다가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임술년(1622, 광해군 14) 2월 28일에 군영에서 졸(卒) 하니 나이 6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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