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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5. 2021

출신 가문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는 정기룡의 흔적

과거나 지금이나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출신 가문이나 학벌이 좋지 않다면 인정받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운과 때가 모두 잘 맞고 능력이 있으며 성과를 이룬 극소수의 사람들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 출신 가문이 좋지 않은 엄청난 사람들 중에 주목받는 사람은 몇 사람뿐이다. 하동에서 태어난 정기룡 장군도 60전 60승 불패의 신화를 남겼지만 출신 가문으로 인해 주목받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동에 가면 임진왜란 당시 역사적 기록으로 전해지는 장군의 위대한 업적인 ‘상주성 탈환 전투’와 ‘용화동 전투’ 장면을 그린 전승을 올린 정기룡 장군 유허지가 있다. 

전후에 그는 병마절도사를 다섯 번, 삼도수군통제사를 세 번이나 맡았을 정도로 조정의 신임이 지대한 조선군의 최상층 지휘관이었지만  그의 공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출신이 미천하였고, 당시 권력의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태어나 1622년(광해군 14)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친 정기룡 장군은 곤양 정 씨의 시조다. 1586년에 무과에 급제했기에 임진왜란 당시에 참전을 했는데 당시 세운 전공에 대해서는 해전의 이순신(李舜臣)에 견주어 ‘육상의 이순신’이었다고

오래간만에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왔다. 개개인으로 큰 꿈을 꾸지 않았다면 출신 가문의 보이지 않은 큰 벽을 느낄 수가 없다. 그나마 정기룡 장군은 24세가 되던 해에 진주의 향리 강세정(姜世鼎)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인 강세정은 당시 진주에서 가장 부유한 향리였기에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옛사람들의 삶을 보면 남자가 능력이 있으면 보통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처가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혼맥은 지금도 많은 케이스로 찾아볼 수 있다.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 속에는 그의 신분을 낮은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도 많지만 특히 후원자로서의 부인 이야기가 적지 않게 언급이 된다. 

능력대로만 대접받는 세상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면 소성의 성과는 올릴 수 있다. 정기룡은 목민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목민심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수령은 모름지기 대학(大學)에서 이르는 바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을 배우는 데 힘써 수령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치민(治民)하는 것이 곧 목민하는 것임을 알았던 사람이다. 

처음 조정에서 이순신(李舜臣)을 위하여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설치하여 수군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뒤에 공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그 직임에 있다가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임술년(1622, 광해군 14) 2월 28일에 군영에서 졸(卒) 하니 나이 6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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