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쓰기

오래된 라디오(Radio of old memories)

사랑의 화폭을 채색하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다. 노란 빛깔과 풍성한 거품이 특징인 에일맥주가 아니라 라거맥주중 인디아 페일 라거(India Pale Lager)처럼 도수가 높은 그런 쓴맛의 맥주가 생각났다. 열대지방에서는 그런 도수가 높은 맥주에 큰 얼음을 넣어서 먹기도 한다. 왜 그런 맥주 맛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씁쓸한 그런 맛을 느껴보고 싶었다.


"오빠! 거기 있어? 말이 없네." 잠깐 동안 다른 생각과 맥주를 연상하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다른 생각했어. 그건 그렇고 연수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어."

"오빠랑 이야기한 것이 한참 전이라서 어떤 주제인지 모르겠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평생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했잖아."

"아~ 사랑의 화폭 이야기 말하는 거지?"

"맞아 그런 거였어. 우리 그 대화를 끝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

"연인과의 만남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아니면 끝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같은 화폭을 보는 두 사람이랄까. 둘 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거지. 각자의 붓도 있고 살아온 시간만큼 물감의 수도 다르다고 생각해."

"각자의 붓과 물감도 다르지만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는 말이지?"

"오빠도 나와 만나면서 여러 일이 있었잖아. 사람이라면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게 싫어질 때도 있고 때론 넘어갈 때도 있는 거야. 그러다가 상대방이 그린 그림에다가 덧칠을 하기도 하고 다른 색깔을 섞기도 하는 거야."

"맞아.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때론 잊어서 싸우기도 했었어."

"두 사람이서 만나면 같은 하나의 화폭을 가질 수밖에 없어. 어떤 그림을 그릴지에 대해서 정답도 없고 추상화가 될 수도 있고 풍경화가 될 수도 있는 걸 인정하지 않고 서로 자신만의 밑그림을 그리려고 하잖아."


생각해보니 그녀처럼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밖에 없고 상대가 드러낸 모습을 온전히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성호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에 대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최고의 연애 수업은 대화 학교에 가라는 말도 있어. 남자와 여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니까. 자신의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고 해도 상대방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거든."

"맞아 그러고 보니 연수는 책 출간 문제로 예민해 있었고 나 역시 미래의 길을 모색하면서 서로에게 소홀했었어."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상대방의 미소 짓는 모습이나 듣기 좋은 말 혹은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살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근데 그날 오빠는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잘 기억은 나지가 않아."

"오빠 자동차 키만 가지고 나간 다음에 연락이 되지 않았어."

갑자기 머리가 시릴 정도로 멍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무슨 일 때문이지 몰라도 말다툼을 했다는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때 정말로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호는 그날 본질적인 연애와 궁극의 고독 속에서 혼란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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