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아리랑 문학마을
사람들을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면서 많은 욕심을 부리고 상대방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축소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나름의 논리를 세운다. 이런 사고방식이 집단화되고 국가가 되면 강점이 정당화되고 수탈 역시 그 일환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지금 세대의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반도의 일제 강점기에 수탈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수탈이란 기본적으로 국가가 가진 자원이나 땅,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수탈은 이 땅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김제와 부안, 군산 같은 곳은 자원이 풍부했던 곳이기에 끊임없이 수탈이 이루어졌다.
김제 아리랑 문학마을은 옛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을 조성해두었다. 당시의 사회상의 일부를 볼 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수탈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일어나기도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수탈을 수탈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 때문에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이다. 이 비는 구마모토 리헤이의 적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극심한 흉년이 정읍 등의 지역을 휩쓸었는데 이때 1,200여 만평의 농장 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가 농사지을 종자를 주어 농사짓게 됨을 고맙게 여겨 1925년에 세운 비석이나 궁극적으로 쌀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
수탈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최소화하는 행위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논리는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제도를 모두 바꾸어버려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축소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죽산이라는 곳은 원평천이 흘러서 동진강이 되고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에 막혀 있지만 서해로 바로 나갈 수 있다. 양곡 수탈의 현장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얼이 담긴 장소가 김제에도 있다. 전국 제일의 미곡 생산지로서 서해안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국도 23호선 지방도 711호선이 종횡으로 면 중심부를 통과하는데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으로서 명량 등 18 개리를 관할하였던 곳이다.
균형적인 생각과 깨달음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가능하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은 일부 이득을 보려는 기득권층인 친일파들의 역할도 컸다.
아리랑 문학마을은 수탈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다루는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을 재현한 곳으로 홍보관,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내촌·외리마을, 이민자 가옥, 하얼빈 역사 등으로 민족의 수난과 투쟁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