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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4. 2021

삶의 길

명성황후 피난 이야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인지하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살면서 겪는 수많은 경험 속에 자신도 모르게 선입견이 쌓여 간다. 자신만의 해석 지를 통해 해석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현실 속의 사람도 그럴진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곡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프랑스 왕조시대의 막을 내린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듯이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명성황후도 비극적인 이야기만 강조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감곡성당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는 명성황후의  원래 임오군란 때 고종 황제비 명성황후가 일시 피신해있던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 있었다.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을 헐값에 사들여서 감곡성당이 자리하게 된다. 여기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는 길은 지금은 좁은 길이지만 예전에는 노은 법동으로 다니는 길로 충주로 가는 큰길이었다고 한다. 경상동에서 과거 보러 한양 갈 때 이길로 다녔다고 한다. 

바로 이길로 넘어갔다고 알려주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음성에서 접하니 조금은 새로웠다. 명성황후를 다룬 일본인의 책으로 기쿠치가 펴낸 책은 '조선 잡기'와 '근대조선 이면사'로 책에는 조선이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고종, 명성황후,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집권층의 무능력함이나 부패상을 상세히 기술하였는데 사실 적지 않은 내용이 왜곡되어 있었다. 

이곳 부근은 왕장리, 오향리, 영산 1리, 월정리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감곡성당의 왕장리 민응식의 집에 있다가 노은면 신흥동으로 거처를 옮길 때 사인교를 타고  길로 갔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되기 전 전형적인 양반가에서 태어나 살았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길로 계속 올라오면 정자와 함께 피난 이야기에 대해 접해볼 수 있다. 1882년 6월 (임오년 고종 19년)에 민응식의 집에 머물다가 노은 이사일 집으로 가서 머물다가 매산 전 판서 민영위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1882년은 봉급은 13개월이나 밀려있었다가 그나마 내준 1개월어치 쌀자루엔 겨와 모래가 섞여있거나 품질이 썩은  쌀이 들어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아왔던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임오군란이라는 살육의 역사를 만든 해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뿐만이 아니라 일본과도 대척점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녀 가 이곳을 새벽에 지날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원래 왕실에서는 사인교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이 없었으나 피난길에는 사인교를 탔다.  두 틀의 사인교는 신랑·신부의 것이다. 신랑 것은 장식이 별로 없으나, 신부 것은 채색이나 술 등에서 신랑 것과는 달리 화려하다.

이곳이 주요 길목이었다니 경북의 문경새재처럼 충북의 길목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피난길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지만 이렇게 피난길도 적지 않게 떠났다. 청나라 등에 의지하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던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고 여주에서 태어나서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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