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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7. 2021

태어나다

예산의 헌종의 태실

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어머니와 연결된 생명력이다. 그것이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남자와 여자와 평등하게 부여된 것이기도 하다. 조선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가 태실이다. 대부분은 시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의 손자로 헌종은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5년 동안 수많은 재해뿐만이 아니라 천주교 박해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흉흉하며 조선이라는 왕조의 끝을 앞당기고 있었다.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고 1836년 남응중, 1844년 이원덕. 민진용 등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는 등 임금을 임금처럼 생각하는 양반의 수가 적었다. 

헌종의 태실을 올라가는 길목은 사유지를 지나쳐서 옆의 작은 길목으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가지 않는지 거미줄이 정말 많이 있었다. 

비록 조선왕조의 왕의 힘은 정조 이후로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대왕 태실의 석물을 개조할 때 예조의 당상관 및 감역관(監役官)이 감독한다고 되어 있다.  대왕 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하고, 이 경계 밖의 수목을 기르는 곳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열심히 걸어서 올라가 보니 드디어 헌종의 태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헌종은 자신이 사랑했던 경빈 김 씨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를 만들었던 왕이다. 중전의 자리에서 그 세를 누린 것은 효정왕후였으나 헌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왕비와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은 경빈 김 씨이다.

헌종의 태실은 조금은 색달라보인다. 색을 밝혔던 헌종은 잦은 성관계 등으로 인해 기력이 쇠하여 23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태실은 대개 대석·전석(磚石)·우상석(遇裳石)·개첨석(蓋檐石) 등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실을 살펴보면 대부분 거북이 석재 조형물로 많이 만들어져 있다.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 씨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되었다. 순원왕후 김 씨는 헌종이 죽자마자 옥새부터 찾았다. 그리고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全溪君,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의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는데 그 사람이 강화도령 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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