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Jul 15. 2021

오성과 한음

당진에 자리한한음 선생 영정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언제 읽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지만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를 들어간 직후였던 것 같다.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는 몰랐지만 두 명의 케미와 함께 현명했던 대처가 인상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부러움도 있었다. 재치 넘치는 일화가 모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는 있었다. 

우연하게 당진의 한적한 국도를 지나가다가 한음 선생 영정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방향을 틀었다. 요즘에는 흐리다가 맑은 날이 자주 생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성과 한음의 일화는 임진왜란으로 혼란해진 사회에 지도층으로서의 양반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곳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한음 선생 영정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갑자기 날이 맑아졌다. 저곳이 한음 선성 영정이 자리한 곳이다. 옆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균형감이 있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에서 가장 재미나게 본 것은 서당 일화다. 서당에서 오성과 한음을 가르치던 스승이 졸자 오성과 한음이 서당에 불이 났다며 스승을 깨웠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스승은 “공자님을 뵙고 왔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이후 오성과 한음이 졸기 시작하자 스승이 이를 꾸짖었는데 두 소년은 “공자님을 뵙고 왔다”라고 말했다. 스승이 “공자님이 뭐라고 했느냐”라고 묻자 오성과 한음은 “공자님이 스승님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해 스승을 골탕 먹인 일화가 있다. 그 당시에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는 몰랐지만 나에게 대하는 것처럼 남을 대하라는 교훈이 머리에 새겨졌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오성 이항복(1556~1618)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으로 서울 남부 성명방(지금의 을지로 일대)에서 태어난 이덕형은 19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라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던 31세 임진왜란이 발발,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데 능력을 보였다. 서울의 한음 이덕형이 태어난 곳은 간 적이 있다. 건물 앞에 표시만 되어 있다. 

한음 선생의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이 당진시 송악읍 금곡길 134에 있다. 한음 선생 영정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한음 선생 이덕형의 영정이 이곳에 있는 것은 한음 이덕형의 후손 중 일부가 당진으로 오며 영정을 필사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쉽게도1998년 문중에서 보관 중 종손이 사망한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해졌지만 영당은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념이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