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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1. 2022

신념이란.

예산에 자리한 최익현 선생 묘

신념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신념이 어디로 향해야 옳은 것일까. 그걸 신중하게 생각하고 때론 잘못된 신념이라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시대의 신념은 옳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향해 있는 듯하다. 법과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껏 행할 수 있다면 결국 그건 독재이며 법 위에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하여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며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였어도 취소되었다. 

신념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생긴다고 해서 혹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 신념이 과연 중립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보고 과연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해야 할 때 조금은 바르게 세워진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면암 최익현이다. 그의 묘가 예산에 있지만 그는 일본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최익현은 이항로에게서 유학을 배웠으며 조선말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 맞서는 때에 위정척사론의 대표 격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그 강직한 성품 덕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을 비판하였다가 사직하기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하자 재정이 부족한 조선의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이라고 시 폐사 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당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흥선 대원군의 지속된 섭정을 반대하며 계유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양도 가고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개항을 요구할 때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날 좋은 때에 예산군에 자리한 최익현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자신에게만 유리한 것을 혹은 편리한 것, 쉬운 것만을 추구하는 이때에 그는 왜 그런 길을 걸었을까. 구한말 대 유학자였던 최익현 선생은 조선땅에서 사로잡힌 후 한양으로 옯겨졌다가 쓰시마(대마도)에 유배되었다고 순국하였다. 장례는 백제 비구니가 만들었다는 대마도의 수신사에서 치러졌다. 

한국사람들은 허례나 보이는 것에 중요시한다. 그래서 굳이 모여서  1년 에 추석, 설날, 제초하는 날을 정해서 멀리까지 가서 성묘한다. 묘를 쓰는 것은 바로 후대에 마음가짐,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조상을 기려서 자신의 앞날이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한국도 시묘살이를 하며 가까운 곳에 묘를 썼다. 그렇지만 지금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해서 멀리~ 멀리~ 묘를 쓴다. 일본의 경우는 미즈무케라는 바가지가 달린 손잡이 물통에 깨끗한 물을 담아 가지고 가까운 곳에 가서 묘비 및 석물에 바가지로 물을 얹어 끼얹는 것으로 성묘를 한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묘는 본래 1907년에 논산시 노성면의 국도변에 마련했었지만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의 명령으로 1910년에 오지인 이곳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되었다. 묘의 입구에는 1973년 4월 9일 예산 모현사업회(慕顯事業會)에서 건립한 최익현의 춘추대의비가 서 있다. 


광시는 소고기가.. 맛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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