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쉼표는 마침표와 달리 잠시의 여유를 주지만 자주 사용하면 흐름이 이상해진다. 살아가다 보면 어떤 쉼표는 자신을 영원히 주저앉히고 어떤 쉼표는 스스로를 나아가게끔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곳을 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서울과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가는 것만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자신이 있던 곳에 소중함과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찾는 것에는 쉼표가 있었다는 것을 아주 조금은 느끼게 하였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때론 멈춰야 무언가 볼 수 있는 시야가 깨일 때가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와 살아갈 때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오빠는 이미 일을 나가서 집안에 없었다. 간단하게 차려놓은 상과 그 위에 덮여 있는 보자기만 보였다. 이날은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밥을 먹고 남은 그릇을 싱크대에서 깨끗이 씻어두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나선 그녀는 문득 마당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쉽게 보지 못했던 수국이라는 꽃이었다. 수국이라는 꽃은 참 특이했다. 땅이 산성이냐 알칼리성이냐에 따라 다른 색의 꽃을 피운다. 산성 토양에서는 푸른색의 꽃을 피우고 알칼리성의 토양에서는 붉은 꽃을 피운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어떤 색의 꽃을 피울 수 있느냐가 결정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표현하자면 서울은 산성, 문경은 알칼리성이지 않을까. 마당에 있는 물을 떠다가 수국 위에 뿌려주었다.
학교를 가는 여정에서 조용하게 걸으면서 문경의 수려한 자연을 만끽했다. 걸어가다가 만난 하천에 돌도 던져보고 굳이 안 건너도 될 징검다리를 건너보기도 했다. 서울의 청계천에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묘한 비린내가 났는데 이곳에는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 물속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보였다. 이곳의 물은 살만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만들게 될까. 물론 일반 과목도 배우게 되는데 무언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앞으로 그와 다시 만나게 될지 어떨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 쉼표를 주는 것과 같다는데 아직은 그 의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흘러가는 물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깨운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지영아! 지영이 맞지?" 다리 위에서 어떤 여자애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너랑 같은 반이야. 니 소개할 때 앞에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나 봐." 아침해가 그녀의 뒤에서 떠오르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지영은 일어나서 계단으로 올라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 너였구나. 그런데 니 이름은 뭐야?"
"나 은경이라고 해. 지금 점촌에 살고 있어서 버스 타고 다니고 있어."
"점촌?"
"응 여기에서는 문경시내가 있는 곳을 점촌이라고 불러."
"그렇구나. 이곳도 시내가 있구나."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 그럼 이곳이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거야. 점촌이라고 해도 그렇게 큰 곳은 아니거든."
"서울에 있어도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아. 난 차라리 이렇게 이쁜 동네가 더 좋아."
"그런데 여기에서는 누구랑 같이 사는 거야?" 그녀가 진짜 궁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오빠랑 둘이서 살고 있어. 뭐. 배가 다른 오빠이기는 하지만 아빠는 같아."
그녀의 솔직한 말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특이한 가정이라고 할까. 그녀의 표정을 읽은 지영은 말을 덧붙였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람 사는 거 별거 없잖아. 오빠도 좀 묵묵하기는 하지만 지내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영은 문경에 와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인 은경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학교까지 걸어갔다. 그녀의 부모는 문경에 정착한 분들로 도자기를 구우면서 살고 있었다. 예전에 TV에서 봤을 때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장작을 넣던 그 모습이 연상되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저 없이 도자기를 깨던 그런 장면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