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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1. 2021

이방인

스스로 완전해지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존재, 인간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보면 전형적인 사회의 부적응자의 삶이면서 기존의 질서와 갇힌 사고를 거부하는 카뮈를 보는 것만 같다. 사회는 질서를 만들고 지위와 사람에 대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놓으려고 한다. 그 속에서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옳은 길처럼 생각하지만 자신, 가족, 조직, 지역을 중심으로 판단하기에 수많은 변수 속에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 세계와 자신의 삶에서까지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 뫼르소가 소설 속 주인공이다. 


세상에 부조리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글쎄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힘없는 정의는 무의미한 메아리이며 정의 없는 힘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기 전에는 좀 더 부조리했고 지금은 조금 더 정의로운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그때는 노골적이었다면 지금은 더욱더 은밀해졌고 경제적인 부조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연애관이나 결혼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세계에서 표현된 느낌은 괜찮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인 공허를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간 작품들은 많았다. 그만큼 세계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걸작들이 그때 탄생하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살인범들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그 잔인성과 어떤 사람을 어떻게 죽였느냐에만 관심을 가진다. 다른 것은 의미가 없다. 굳이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철학적인 고심 없이 그냥 떠드는 말로 뉴스로 만들어낸다. 그들의 목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다. 재판에 가면 판사들이 알아서 형량을 내릴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가를 알려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이방인에서 살인을 하였으며 일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한’ 뫼르소가 왜 살인을 했는지에 타당성을 주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발적 살인 이후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더 많은 것을 보는 사람을 최대한 외면하려고 한다.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는 이유다. 


우리는 어릴 때는 이방인에서 출발해서 사회인으로 편입이 된다. 타인의 판단에 좌지우지되고 타인의 생각을 미칠까 봐 두려워한다. 그게 사실이었어도 숨기려고 한다. 경제적인 이득이나 자신의 이미지 때문이다. 타인에 의해 내려진 사형 선고를 받으며 뫼르소는 마지막 유혹,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떨치고 자신의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면서 스스로 완전해지고 스스로 고립되며 사라지게 된다. 


1959년, 카뮈는 쓰다가 중단했던 '최초의 인간'을 다시 쓰기 시작했지만, 이 작품은 1960년 1월 4일,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미완으로 남게 된다. 이때의 나이가 47살이었다. 누군가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해지면 피카소나 카뮈처럼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카뮈는 신화가 되었다. 그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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