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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2. 2021

무령왕 (武寧王)

백제의중흥군주공주에 서다.

백제의 역사가 잘 알려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의 백제는 단편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건국과 공주 천도, 부여 천도 외에 무령왕을 배우고 대부분 망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귀결로 이어지며 의자왕만이 주목받았다. 그리고 계백의 장렬한 전사로 백제는 그렇게 기억되어 왔다. 백제의 역사는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금의 공주가 있게끔 만든 군주는 제25대 왕이었던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40세에 즉위한 이후 523년 붕어 전까지 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와 민심 안정을 이루고, 519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을 선포하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았었다. 

얼마 전 공산성 앞에는 무령왕의 상이 제막되었다. ‘사마에서 무령으로’은 그가 백제의 왕이 되는 것으로 무령왕의 출생부터 즉위, 붕어에 이르는 무령왕의 생애를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가 되었다. ‘권위의 상징물-왕과 왕비의 부장품’에서는 부장품의 위치와 의미, 세트화된 장신구를 포함한 무령왕과 왕비 부장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 수가 있다. 

백제의 왕들은 교역의 필요성을 알았었다. 군사강국 고구려나 약자에서 통일신라로 나아갔던 신라와 달리 백제는 교역을 통해 많은 문화를 전파하였다. 

무령왕이 어떤 발걸음을 했는지와 공주에 자리했던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어냈던 그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번 무령왕 동상 건립 역시 그 일환으로, 총 9.5m에 달하는 동상은 무령왕이 중국(양나라)에 갱위 강국 선포 국서를 보내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공주시는 무령왕릉 발굴 50년, 갱위 강국 선포 1500년을 맞아 올해를 ‘무령왕의 해’로 선포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일본의 가카라시마(加唐島)의 오비야우라동굴(‘허리띠’의 일본말은 ‘오비야’. 왕비가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동굴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출산하였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시마끼시(島君, 섬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시마)라 지었다. 그가 후일 백제의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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