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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23. 2021

논공행상 (論功行賞)

논산에 자리한김완 장군영당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삶에서 가장 큰 이견은 논공행상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자신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인정받으려다보면 주려는 사람과 받으려는 사람은 관점의 차이를 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 그 차이는 작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크게는 조선시대에 반정이나 개국공신들에게서의 논공행상이 거론되기도 하고 선거에서 이기면 자리를 하나씩 만들어주기도 한다. 개개인으로 본다면 사사로이 지위나 돈을 버는 것에 있다. 

반정 등에 성공을 했지만 논곤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여럿 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자리에 올라선 인조를 공주까지 밀어냈으며 결국 병자호란의 빌미까지 만든 이괄의 난은 대표적인 난이다. 논산과 공주의 끝자락에 자리한 이곳의 학성군 김완장군 영당은 이괄의 난을 제압한 사람중 한 명이다. 

김완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과 함께 세상에 알렸으며 광해군 7년 (1615년) 과거에 급제하고 고사진 절도사를 거쳐 창성방어사라 있을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김완장군 영당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것은 그의 손자인 운산공(김세중)이 해남에서 태어나 외가인 공주를 자주 왕래하다가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해김씨 운산공파 중시조가 되었으며 세상을 떠났을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김해김씨는 저 아래지방인 김해가 시작이었다. 김해에서도 그 유명한 김수로왕에서 시작되었으며 초기가야의 맹주이기도 했었다. 

현종과 숙종 시대에 절충장군 맹산현감 운산군수 가선대부 중추부사 병마첨절제사를 거쳐 이곳 운산공파에 김완장군 손자인 운산공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논산과 공주의 경계가 명확하지만 당시에는 공주와 논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을때였을 것이다. 공주에 속했다가 논산에도 속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지금은 논산지역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이 된 것이다. 난을 일으켰던 이괄은 40여 명을 이끌고 광주를 거쳐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이날 밤 반란군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은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하면서 이렇게 해서 이괄의 반란은 평정됐다.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만과 정충신, 김완, 남이흥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봉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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