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 자리한 문창후 최치원 영당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주 최 씨의 시조이기도 한 최치원의 흔적을 정말 많이 보게 된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 그의 글이며 문장이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았던 그때 구석구석도 잘 찾아다니며 그 경치를 노래하기도 했었다. 전국의 향교에 배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최치원을 내세우는 지자체도 많다. 개인적인 행적으로만 보면 참 경이로운 인물이다.
창원의 경계선상에 들어서면서 보게 된 지역 회성동은 소소한 볼거리와 이야기가 있었다. 두척계곡, 회성천, 교화벚꽃길, 벽화골목, 임항선꽃길과 볼거리들이 있는데 그중에 눈에 뜨인 것은 최치원 선생 영당이었다. 이곳에도 최치원을 모신 영당이 있었단 말인가.
당장 찾아서 나서보았다. 네비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표시된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와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물이 흘러내려오는 옆의 도로 쪽으로 들어가 본다.
‘삼국사기’ 권 46, 열전 6은 강수・최치원・설총 등 3인의 유학자로 구성되었으며 유교의 10현은 ‘삼국사기’ 설총 전에 의하면, 최승우・최언위・김대문・박인범・원걸・(왕)거인・김운경・김수훈・최치원・설총 등 10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대 삼국통일부터 하대 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인물들이 선정 대상이었다.
회성동에는 고목들이 여러 그루가 잇는데 회성 당산목과 이곳에 자리한 두곡 보호수도 오래된 고목이다. 이 고목을 보았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치원 선생 영당을 찾아가 볼 수 있다. 100여 미터를 위쪽으로 올라가면 골목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마을의 곳곳에는 정겨워 보이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어떻게 채색하였는지 잠시 멈춰서 바라보았다. 신분과 가난 불평등으로 차별받지 않는 공정한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하여주시고 가야산 신선으로 하늘사람이 되었다는 최치원은 지성을 상징하는 대표인물이다.
드디어 영당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면 문창후 최치원 선생의 영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문사(文詞)는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솜씨는 천하일품이었고 종횡무진했다. 그 는 글을 사랑하는 우리 선비의 시원이었고 사표가 되었던 사람이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녔던 최치원의 문인풍 영정은 대체로 전라도 일대에 있고 영남에는 신선풍 영정이 많은 편이다.
이곳이 두곡마을이어서 그런지 안에 소박한 건물에는 두곡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에게도 가정이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머물면서 원만하게 유지되었는지는 가끔 궁금하기도 하다.
영당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목에 벽화에서 꽃을 찾아온 나비가 눈에 뜨였다. 나비는 꽃을 찾기 위해 떠난다. 문창후 최치원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많은 흔적이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추구한 삶은 한계가 없는 세상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을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재능의 글로 곳곳에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