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랐던 독립의 길 천안의 조병옥과 유관순
1919년은 한반도에 있어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한 해였다. 흔히 알려진 삼일운동의 관점을 넘어서 민중이 주인이 될 수 있는 기점이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고종의 가장 큰 실책은 민주국가로의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황제국으로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점이 다르냐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황제와 흔히 말하는 을사오적들의 결정만을 가지고 나라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힘없는 나라가 황제국을 선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8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었다. 천안에서 1894년에 태어난 조병옥 박사와 1902년에 태어난 유관순 열사의 시간이다. 모두 일제강점기 전에 태어났지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에 휘말리게 된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운명의 길은 달랐다.
천안에 자리한 조병옥 박사와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지금 보존이 되고 있는데 둘 다 초가집이다. 천안에는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을 따라서 길을 조성해두었다. 이른바 역사문화 둘레길이다. 대한독립만세 길, 유관순길, 조병 옥길, 홍대용 길, 김시민길, 박문수길, 이동녕길, 독립기념관 길이다.
조병옥 박사의 길은 조병옥 생가지에서 도현 마을을 거쳐 홍대용생가지로 이어지는 길로 2.5km 구간이다. 그렇지만 조병옥길과 유관순길로 이어가는 길도 이어져 있다. 유관순사적지에서 유관순 생가지, 조병옥 생가지의 길은 2.17km 구간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조병옥은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 땅에서 학교를 진학하던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베이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19년의 삼일운동은 외국에서 접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 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오랜 시간 유학의 시간을 끝내고 귀국한 것은 1925년이다. 자신이 졸업한 연희전문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독립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지만 그는 나라의 광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했지만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조병옥 생가지에서 조금 더 오면 그보다 8년 늦게 태어난 유관순 생가지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외국 유학길에 갔던 조병옥과 달리 유관순은 변화를 그대로 목도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후 학교가 휴교하자 유관순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역사문화 둘레길을 가볍게 둘러보면서 둘 사이의 8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그 시간은 같은 관점 다른 시각을 가지게 한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은 자신의 생가에서 만세시위를 위해 준비하는데 이때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식을 유학 보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고 난 후 한 달이 지난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아우내 장마당에는 약 3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날 아우내장터로 들어오는 세 방향의 길목에서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유관순과 지령리 사람들이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삼일운동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민초들의 테러로 보았다. 평화시위였지만 지금의 국가보안법의 대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대한제국의 황제와 을사오적들이 이미 나라를 병합하는데 승낙을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는다는 권리 같은 것은 인정되지 않았다.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유관순의 말에 일본 재판관은 격분했다. 일본은 지금도 한국과 달리 행정과 사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최근에 배상 결정을 내린 법원의 판단에 한국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사법을 행정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천안에서 태어나 조병옥과 유관순은 독립을 향해 다른 길을 걸었다. 새로운 세대의 탄생이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세대 구분과는 조금 다르지만 항일과 일본을 통한 근대화 사이에서 친일 행보를 보였던 구세대와 비교되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였다.
역사문화 둘레길을 걸으면서 생각해보았다. 여전히 세대는 새롭게 만들어지면 세대를 관통하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아니라 생각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도 있고 갈등의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