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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여 밝히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3·1 운동 순국 유적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가깝게 다가갔을까. 지금까지 많은 것이 숨겨지고 왜곡되기도 하고 학살이나 만행이 포장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과 사회상규가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할 때도 있다. 지금의 기준에서 삼일운동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민족은 당연히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에 대해 미루어 짐작해볼 때가 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 가해자들은 법에 의해 심판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발품을 파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직접 가서 보고 확인하고 상황을 판단해야 비로소 그 사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화성의 제암리라는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후 계속되는 시위에 대한 경고와 보복이 이곳에서 일어났는데 이때 일본 육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묻힐 뻔했지만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

임암리에서 학살이 있기 전에 일본 경찰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 민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했다. 후에 이 사건은 '수촌리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역마다 모두 탄압과 폭행 혹은 학살이 일어났다.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4월 15일 일본 보병 79 연대 소속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 헌병들이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라고 했는데 이때 아무 의심 없이 갔다가 모두 살해된다.

평화시위로 시작되었지만 강한 탄압으로 인해 폭력적인 형태로 확산이 된다. 일본은 이에 틀별 검거반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곳 전시관에는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를 않았다. 일부 지도자층이나 지식인들은 다르게 대접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계몽시켜야 될 대상으로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결국 무죄를 선고받게 된다. 그 행위는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9년 8월 21일 일제는 아리타의 학살 행위는 있으나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고 판결을 내린다.

발굴조사를 통해 사람들의 유물이 나왔다. 1982년에 유해 발굴조사에서 9개 지역에서 108명이 투입되었다. 지금도 일제강점기의 사건들이 재판정에서 일본과 다투고 있지만 1991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으나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족회의 발족, 현충사당 건립, 연극과 영화 제작 등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독립운동 정신을 알리기 위한 유족들의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제암교회를 비롯하여 화성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형식의 독립영화인 두렁 바위도 제작이 되었는데 제작 37년 만인 2009년 필름 복원 작업을 거쳐 공개되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곳의 기록들은 선현들이 겪은 슬픔을 오늘에 되새기려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잔인무도한 비행을 인류 앞에서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약자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고 이런 상황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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