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집 같은 화성의 정수영 고택
벌써 3년째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날은 친인척이 모이지 않는 것이 권장되어가고 있다. 명절이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족이 모이는 그런 의미를 담은 연휴로 기억을 하고 있다. 가족 중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살을 더 먹게 만든다는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보통 고향이라고 하면 머릿속에는 집 앞에 이런 고목 하나쯤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한다. 설날에는 추석처럼 맛있는 과일이 많지는 않지만 새해가 시작되면서 새로움을 느끼는 시기이기도 하다. 수확이 모두 끝나고 새 생명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시기의 논을 바라보며 자리한 고택은 그런 정취가 있다.
신도시가 들어서 있는 화성시는 지금 현대적인 모습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넓은 면적의 화성시에는 농촌의 정취를 간직한 곳이 적지가 않다. 서신면에 자리한 국가 민속문화재 제125호 지정된 화성 정수영 고택 (華城鄭壽永古宅)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자형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마을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의 축대에 설치된 계단에 올라서면 대문간이 나온다. 대문간 서쪽에 사랑방이 자리하고 있다. 위에 곶감이라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옆의 작은 방의 처마에는 메주가 있다면 딱 안성맞춤처럼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안채의 상량문 묵서에 ‘대한광무삼년기해이월이십사일미시입주상량(大韓光武三年己亥二月二十四日未時立柱上樑)’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실시한 광무개혁으로 인해 대한 광무 3년이므로 1899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광무 3년은 메이지 일본의 상징인 명치 황제의 32년이며 광무로 표시되던 년호는 일제강점기에 소화로 바뀐다. 광무황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이다.
정비가 잘되어 있어서 마치 민속마을에 자리한 집처럼 보인다. ㄱ자형의 서쪽 변은 안방과 부엌이고 북변은 남향한 대청과 건넌방이 나온다. 초가집이지만 목재를 사용하고 황토로 마무리한 것이 상당히 깔끔한 편이다. 목재를 자세히 보면 이 집을 어떤 기술을 가진 사람이 지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화성 역시 중부권의 고택 유형을 가지고 있는 지역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루는 튼□자형의 배치는 이 지역에서 주류를 이루는 유형이다. 사랑방·대문·작은 사랑방은 남쪽에, 헛간과 곳간은 뒤편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정수영 고택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면 언덕에 자리한 고택이 한 채 더 있다. 화성 정시영 고택이다. 안산(案山)이 노적가리를 닮은 산이어서 누대로 재록(財祿)을 누릴 수 있는 명당터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지는 고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시야가 잘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시영 고택의 건립 연대는 솟을대문의 상량대 묵서명(墨書銘)에 대한제국 선포하기 이전인 1887년(고종 24) 문을 세웠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실제 최초 건립 시기는 50년이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문에서 보면 집은 한쪽만 보여 큰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큰 저택이라고 한다. 실제로 찾아가서 보면 대지면적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쪽으로 돌아서 산기슭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솟을대문에 당도하는데 대문은 북북서향을 한 정시영고택은 국가 민속문화재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