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배향하는 신항서원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은 각각의 이유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존경하는 것과 훌륭한 인물을 배우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간디라는 사람의 삶을 말하면서 자식들이 그 길을 걷는 것에 흔쾌히 수락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66세를 맞이하는 해의 입춘에 성호사설을 쓴 대학자 이익은 자신의 배움의 부족을 스스로 탓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老人도 배움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배우지 않으면 망령 든다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삼남이라고 불렀는데 삼남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서원은 바로 이곳 청주의 신항서원이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3년 경오년(1570년)에 청주의 사림(士林)이 유정곡(有定谷)에 서원을 창립하고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고 했던 곳이다.
인문학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며 이제 디지털로 나아가고 있는 신항서원은 디지털 미디어를 접목해 역사와 문화 체험이 가능하도록 했다. 신항서원은 이이 선생을 비롯해 고려 후기의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경연·박훈·김정·송인수·한충·송상현·이득 윤 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신항서원의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옆 협문으로 된 내삼문(內三門), 6칸의 재실 겸 강당, 5칸의 수호사(守護舍), 묘정비각(廟庭碑閣)·외삼문(外三門)·정문(旌門) 등이 있다. 이곳에 배향한 사람의 면면만 봐도 상당하다. 잘 알려진 목은 이색이나 송상현, 율곡 이이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다른 사람들도 학문과 덕행으로 뒤처지지 않는다.
신항서원으로 오니 개 두 마리가 마중 나와서 계속 따라다닌다. 선조 때 창건되었던 신항서원은 임진왜란 때 병화(兵禍)로 훼손된 것을 곧이어 복원하였으며, 1660년(현종 1)에 ‘신항’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서원이 자리한 곳은 청주시 용정동인데 이곳에 용성골과 이정골이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정골이라는 마을 혹은 정자의 이름은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신항서원은 호서지방에서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용정동에 자리하고 있지만 도로명으로 바뀌면서 이정골로로 주소가 표기가 되어 있다. 신항서원에 배향된 율곡 이이는 아홉 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이론적인 성리학과 현실이 조화된 길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신항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오른편에 위치한 용정저수지를 찾아가 보았다. 뒤쪽으로 산행을 하면 것대산과 낙가산으로 갈 수 있다.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스스로의 루틴이 바로 서 있다면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있지만 그 여파를 예측할 수 없을 때는 꼭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삼남지방에서 가장 컸다는 신항서원이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배향된 사람들의 생각만큼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