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그렇게 힘들게 피었건만 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이 꽃의 숙명이다. 지는 꽃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지만 지는 꽃마저 가슴속에 담아두게 하는 꽃이 있다. 바로 낙화의 아름다움이 담긴 동백이다. 입춘에 살포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동백은 홀로 이 시기에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낙화를 한 뒤에도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는 꽃이다. 동백의 짙은 붉은색을 연상해보면 마음속에 붉은 여운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껴볼 수 있다.
이렇게 세찬 바람이 불고 있는 데에도 동백꽃은 절기에 맞춰 한 번의 생을 열고 있었다. 계절의 마지막의 뜻을 가지고 있는 절분(節分)은 입춘의 전날이다. 다시 시작이 된 것이다. 봄은 아니지만 봄같이 느껴지는 때다.
마량리는 중부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제주도와 같은 섬을 붉게 물들인다는 청춘의 피꽃도 있지만 이렇게 추운 곳에도 볼 수 있다. 제주도는 4.3 사건의 상징이 동백이며 부산의 시화는 동백꽃이다.
늘 푸른 상록수의 윤택한 잎을 가진 동백은 풍류를 보여주는 꽃이며 생명의 꽃이기도 하다. 한 겨울에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했던가. 사람은 힘들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마치 세한지우같이 말이다.
이곳에서 세한지우(歲寒之友)라고 부를 수 있는 동백을 만나봐야 할 시간이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자란 꽃이라는 동백은 귀한 조매화이기도 하다.
계단을 올라가서 먼저 서천의 낙조가 있는 바다를 보고 동백을 만날 수도 있고 평탄한 길을 걸어서 동백을 먼저 만나고 서해의 바다를 볼 수도 있다. 항상 그렇듯이 힘든 것은 먼저 하자 주의라서 계단을 먼저 올라가 본다. 가파른 계단은 언제쯤 익숙해질까.
올라와서 안쪽으로 걸어오니 동백정이 보인다. 요즘에는 거제도를 안 갔는데 그곳에는 청마 유치환의 생가가 남아 있다. 그는 동백꽃이라는 시에서 동백을 소리 없이 피는 청춘의 피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만나보았던 세찬 바닷바람은 이곳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 위의 태양은 흰색으로도 표현되지 않는 묘한 번짐이 있다. 노란색과 눈부신 흰색의 적당한 배합처럼 보인다.
동백의 꽃말처럼 신중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런 삶이 좋다. 허세를 부리지 않아야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상록수가 어우러진 곳이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의 매력이다.
다시 발길을 돌려서 동백을 보기 위해 걸어서 내려가 본다. 이곳으로 걸어왔으면 조금은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식용과 약용으로도 사용하는 동백에는 지혈작용도 있다고 한다. 동백의 다른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인데 동백꽃차는 그런 향기를 품은 새봄의 차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동백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동백꽃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꽃받침도 없이 홀로 피어나는 동백꽃은 사람이 정열과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 세상은 잿빛처럼 보이지만 낙화하면서도 붉은 여운을 남기는 동백으로 한 해의 에너지를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