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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6. 2022

마량포구

서해랑길 속에 들려오는 파도소리 

정확하게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아서 바뀌는 현상이 일출과 일몰이다. 세상의 변화가 그렇게 이루어지는데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에 불과하다. 전국의 곳곳에는 해 뜨는 말이 있는데 해 뜨는 서천의 마량포구 역시 그런 지형을 가지고 있다. 마량은 진입하기가 용이해서 그런지 서양인들이 상륙했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도 서천 마량 마을의 안쪽에 있다. 

처음에는 마량포구에 먹기 위해서 왔다가 다음에는 바다를 보러 왔다가 해가 갈수록 마량에 남겨진 사람과 마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지금 마량포구는 처음 왔을 때에 비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해 뜬다고 하는데 낮인데도 해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서천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지 60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 10월 15일 지방행정구역 명칭 개정이 이뤄지면서 서천군의 지명이 '서주'에서 '서천'으로 바뀌었다. 전국적으로 지역명을 잘 보면 일제강점기 이후에 도시가 만들어진 곳을 제외하고 '천', '양', '주'가 붙어 있다. 

마량항은 홍원항과 함께 서천군 서면 어업인들의 근간이 되는 어항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에 갯벌까지 너른데, 썰물 때면 그 폭이 1km가 넘는 갯마을이 지근거리에 있다. 

마량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있지만 상시 바닷물이 채워져 있어서 어항으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서천은 본래 백제의 설립군인데 신라에서 서림군으로 바뀌었고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서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후기 1816년(순조 16년) 마량진 갈곶에 일시 정박한 영국 함선 알세트호의 선장 머리 맥스웰 함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첨사(수군 첨절제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한 곳이 마량이다. 

지금은 다른 국가로 가는 것이 수월해졌지만 과거에도 모든 것이 연결이 되어 있었다. 영국 함선이 왜 이곳까지 왔을까. 인도를 발견하고 중국과 교역하던 영국은 홍차와 다양한 물품을 교환했다. 이때 미국은 노예를 활용한 목화로 만든 면의 생산이 활발했다. 흑인들의 피와 땀으로 생산된 면의 상당 부분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유럽은 면을 중국으로 수출하려고 했으나 중국은 비단으로 인해 면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무역 불균형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고 일컫는 마약전쟁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흐르고 있다. 바다는 고요하지만 그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마량포구 역시 봄이 되면 다시 사람들이 찾으며 변화가 일어날 듯하다. 마량포구 방파제는 고기가 잘 잡히는 포인트인데  새벽에 마량포구 어판장에 가면 어민들이 갓 잡아 온 싱싱한 해산물을 경매하는 광경과 함께 지형적 위치상 일출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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