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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15. 2022

전쟁의 시대

정유재란에서 정묘호란을 겪다. 

전쟁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기억되지 않았을 사람들이 기억되게 만들기도 한다. 수많은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외세에 의해 전역이 화마에 휩싸인 대표적인 전쟁은 왜란과 호란이다. 모두 지정학적인 여건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의 에도막부를 형성하는 시기와 중국 왕조의 교체시기에 일어났다. 이른바 전쟁의 시대였다. 이런 격동기를 거쳐서 안정적인 조선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쇠약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전쟁의 시대에 시간을 뛰어넘는 영웅이 나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극적인 순간에 분위기를 반전시킨 사람에 대해 매료가 된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 이순신만큼 기억되는 사람이 있을까. 이순신은 1597년 조선과 강화가 결렬되지 일어난 전쟁 정유재란중 노량해전에서 승리했지만 전사하게 된다. 이때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싸우다가 전사한 남유장군이 있다. 

당진에는 의령남씨인 남유장군과 그의 아들인 남이흥장군의 묘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기리는 충장사와 그 충성심을 기리는 남씨양세충신정려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암흑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대표적인 전쟁 이야기인 초한지나 삼국지 역시 엄청난 희생을 기반으로 했지만 우리는 영웅과 전략가의 이야기만 기억한다. 

충장사 아래에 있는 오래된 고택은 조금 특이한 형태의 고택이다. 계속 수선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자연스러워 보인다.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그 시대를 그렇게 잘 표현했으면 우리는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을 비극적으로만 기억하지 않을 수 있다. 수많은 전략가와 장군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단편적인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조금 올라가 보니 사당의 위에는 남씨양세충신정려라는 현판이 보인다. 1636년에 세워져 1963년에 내부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남씨양세충신정려의 남이홍 정려와 남유의 정려를 뒤로 하고 언덕으로 올라가면 충장사가 보인다. 이곳은 남이흥장군묘역으로 충장사, 남씨양세충신정려, 고택, 모충관1, 2, 충장정등이 자리하고 있다. 

남이흥장군의 부친인 남유장군이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들은 남이홍 역시 무인의 길을 걷는다. 그는 아버지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에 생각을 바꾸어 문신의 길이 아닌 무신의 길을 걷는다. 남이흥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자는 정충신(鄭忠臣)의 주장에 동조해 대승하며 이 공으로 연안부사가 되었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된다. 

남이흥장군의 묘 일원에는 남이흥장군을 비롯하여 부인 하동정씨, 부실 연안김씨, 아버지인 남유, 어머니인 전주 유씨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에 있었으나 성남단지 조성 때인 1971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수도권의 인구 분산 정책에 따라 조성된 경공업 중심의 지방 산업단지가 1968년부터 조성되었는데 이후 중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지금 중공업이라고 뒤에 붙는 기업들이 성장한 것이 1970년대다. 

이후 국경방어를 하고 있던 남이흥은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서 후금군(청나라)을 막았는데 속도가 빠른 기병 위주의 3만의 후금군은 순식간에 의주, 능한산성, 안주성에 이르렀으나 막지 못하고 함락되게 된다. 그러고보니 3만이라는 군사는 초나라의 항우가 50여만의 한나라 유방의 연합군을 격파한 숫자다. 

막지 못한 남이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에 추봉 되었다. 개인적으로 역사이야기도 정말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이야기지만 기억하기 위해서는 단순 사건의 나열 같은 것은 재미가 없다. 일본군에 맞섰던 남유장군과 청나라에 맞섰던 남이흥장군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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