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 송상현 임진왜란 동래성에서 항전하다.
로마가 몰락한 이후 서양이 그러했듯이 일본 역시 오랜 시간 전사들의 시대를 살아왔다. 에도막부 이후로 다시 사 사무라이 시대로 돌아갔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 군인의 시대를 열었다. 군인과 전사 혹은 무사와 다른 점은 규율이라던가 단결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사무라이와 군인이 함께 들어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들어놓은 군사조직은 효율성을 중시하여 빠르게 한반도를 유린할 수 있었다.
청주에 자리한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순식간에 함락당한 부산성이후에 동래성을 지키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모신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다. 충렬사는 1610년(광해군 2) 동래에 있던 묘소를 지금 위치로 옮기면서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옆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날이 참 좋아 보이지만 정말 추운 날이었다. 아무튼 일본은 오랜 시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병사들에게 무기를 장전하고 발사하는 방법 이외에도 발을 맞춰 행군하는 제식훈련도 이루어졌다. 조선의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합류하는 농민들의 집합과 신식무기를 경험할 기회는 없었다.
충렬사의 사당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우고 3칸으로 구분된 계단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단(壇)을 구분하였는데 사당 아래 마을 입구에는 1595년(선조 28)에 세운 송상현충신정려문(宋象賢忠臣旌閭門)이 남아 있다. 멀리까지 탁 트인 곳에 잘 조성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이날도 계단을 많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는데 그때 서양에서는 이미 화승총에서 머스킷으로 대체가 되었다. 머스킷은 명중률과 화력이 더 뛰어났다. 지금도 재현이 되지만 화승식 발사장치는 총구에 화약, 뭉치, 총알, 뭉치 순으로 장전하고 꽂을대를 사용해 다져 넣고 총기를 평평하게 한 다음, 다른 종류의 화약을 약실에 넣은 후에 불이 붙은 화승을 격발 장치에 붙인다. 그리고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면 화살이 훨씬 더 빠르지만 화살을 잘 쏘기 위해서는 숙련된 무인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군인이 농사를 짓다가 잠시 조직으로 들어갔던 조선에는 능숙한 군인이 적었다. 좀 복잡하더라도 열심히 반복하면 화승총(조총)을 사용하는 일본 군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동래성은 군사수에서도 열세여서 동래성 부근에 살던 백성들도 함께 항전하였다. 그렇지만 곧 전세가 불리해졌다. 송상현은 부친에게 “달빛에 비추인 외로운 성은 줄지어 선 군진을 높은 베개로 삼았고, 군신의 의리가 무거움에 부자의 은혜는 오히려 가벼운 듯 하구나 [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라는 글을 남기고 순국하게 된다.
송상현이 근무했던 동래읍성은 동래 부사가 고을을 통치하고 왕명을 받드는 동헌과 객사 등 핵심 관청과 소속 기관들이 있는 중심 읍치를 둘러싼 성곽이다. 송 씨하면 흔히 대전의 송촌동의 집성촌을 이룬 은진 송 씨를 생각하는데 그는 여산 송 씨였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조선은 스스로를 알지 못했다.
전국에 있는 충렬사는 조선을 위해 싸우다가 순절한 충신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 청주를 비롯하여 부산, 통영, 부산, 남해, 충주, 정읍, 대전, 광주, 원주 등에 충렬사가 있다. 조선과 일본의 무기와 조직의 차이는 큰 격차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정보가 부족했던 동래성의 송상 현부 사는 그들의 전략에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일본 역시 초중반의 우위는 화승총의 한계로 인해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밀렸다. 단점을 보완한 방식인 바퀴식 방아식 장치도 있었으나 가격이 비쌌다. 참고로 바퀴식 방아식 장치는 당시 독일의 시계 기술에서 비롯이 되었다. 시계처럼 단단하게 담긴 강철 스프링으로 작동했다. 지금 오토시계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일본은 전쟁을 치르면서 서구에서 수입한 화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사격 방식을 사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에서도 사용되었는데 후에 전쟁에서 크게 발전되었고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에 잊히게 된다. 청주시에서는 천곡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에 인근 부지를 확장 정비하여 전시관과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주변을 공원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경력·집의·사간 및 사재감과 군자감의 정(正)을 지냈던 송상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해인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는데, 당시 왜적의 침입이 예상되던 때였으므로 방비에 힘썼지만 동래성에서 전사한다. 본관은 여산.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아버지는 현감 복흥(復興)인 송상현은 사후 이조판서·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부산 충렬사, 개성 숭절사(崇節祠), 청주 신항서원, 고부 정충사(旌忠祠), 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