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국가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현대의 국가처럼 사람이 모이게 되면 옛날 그리스처럼 아고라에 모여서 주요 정책을 결정하던 소규모 도시국가를 벗어나 지금과 같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지도자를 뽑는 것과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은 대의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 잡았다. 투표는 민주적이지만 국민이 지향하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투표로 뽑지만 발언권은 모든 세대와 계층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한 떨기씩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각각의 사람이 한 떨기 꽃과 같지만 조금만 멀리서 보면 동백나무 한 그루가 된다. 한 그루의 동백나무에 피어난 동백꽃은 모두 같은 때에 피고 같은 때에 질까. 크기도 같지 않고 모양도 비슷하지만 다르다.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지도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국민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다. 그래서 참모진이나 책사가 중요한 이유다. 특정계층, 지역, 연령, 소득, 학벌, 성별 등에 균형적으로 배분되지 않고 만약 특정 그룹을 이해 대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충청남도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무학대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태조의 왕사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서산 간월도에는 무학대사의 아버지 박인 일이 정착하기도 했었다. 그가 서주 관아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했는데 마침 집에 없자 대신 끌려가던 그의 아내가 이곳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은 모월리 고개였는데 이곳에 관원들이 아기를 놓고 갔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학이 아기를 감싸고 있어서 학돌재라고 불렀으며 아기이름을 무학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때가 1327년(충숙왕 14)으로 고려 명장 박서 장군의 후손이며 왜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서주군수는 양식과 돈을 탕감시켜주었으나 부상당했던 팔의 상처가 악화되어 그만 박인일은 사망하게 된다.
이곳이 바로 무학대사가 태어났던 곳이라고 하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무학대사는 수도이전을 위해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으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의 서울과 계룡산지역 등을 살펴보았으나 서울로 도읍이 결정되었다. 국가들은 수도를 왜 이전했을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기득권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도약이다. 국가적인 투자가 집중된 수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원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생기는 폐해는 과거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 이병박 정부 때에 세종시로 행정수도의 이전에 제동을 걸었던 서울이 조선시대부터 관습법상의 수도라는 법원의 해괴한 판결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로 가서 경국대전을 수정(한양의 수도역할은 조선에 한한다)해야할까. .
아버지가 없던 무학대사는 18살에 용문사에 들어가 소지선사를 스승으로 심법을 배우고 뒤에 도승 나옹과 지공화상의 법을 받고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 그는 1405년에 입적하였는데 왕명으로 시호를 받았다. 스님이었지만 그 역시 태조 이성계의 참모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참모의 역할은 사적인 이해관계가 없이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서 전해주는 일이다. 국가적인 일에는 무엇보다도 명분이 중요하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온전하게 개방된 청와대를 얼마나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면 용산의 국방부에 있는 장성들이 적폐들이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개개인의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 있지만 전 국민이 영향을 받는 정책은 효율과 능력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벌이나 시험 등을 통과해서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로 채운다고 해서 설계가 잘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석학들이 모여 만든 투자회사가 쫄딱 망한 사례도 있다. 무학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과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적어도 요승이나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설득력 있는 명분은 개인의 삶에도 중요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에서도 꼭 필요하다. 사람은 명분이 서면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