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다 - 덕봉서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결혼한 남자와 여자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누군가가 다시 후대로 이어가게 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특히 권력욕을 가진 사람은 더욱더 그런 성향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하물며 조선시대의 왕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역사를 보면 왕과 후손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흐름에 따라 왕비와 배후세력들에게 힘이 실리기도 했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1688년(숙종 14) 10월 28일에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게 된다.
안성에 자리한 덕봉서원은 2022년으로 세워진지 327년이 된 서원으로 올해의 가치를 정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2022년 3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서예교실, 안성지역사, 안성문화유적 답사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곳이다. 덕봉서원은 바로 장소의(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려고 했던 것에 반대하고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는데 상소를 올렸다가 죽음을 당한 오두인을 모신 곳이다.
중전이 되기 전까지 내명부는 왕의 승은에 따라 빈(嬪),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소용(昭容), 숙용(淑容), 소원(昭媛), 숙원(淑媛)으로 구분이 된다. 아들이 낳기도 전에 장 씨는 이미 정 2품인 소의에 책봉되어있었다.
장 씨가 아들을 낳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왕비 민 씨(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게 된다.
오두인은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 당하게 된다. 경기도 시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덕봉서원은 1695년 숙종(21)에 세워졌는데 6년 전인 1689년(숙종 15)에 오두인이 국문을 받고 세상을 떠나고 6년 만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인 덕봉서원은 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10칸의 정의당(正義堂), 동재·서재·외삼문(外三門)·내삼문(內三門)·홍살문[紅箭門]이 보존되어 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의 뒷배로 권력을 쥐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권력을 잃어버린 장희빈이 자신의 권세를 누린 기간은 5년에 불과했다.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숙종은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 씨를 폐출하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았다. 서인 노론 측은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게 된다.
덕봉서원으로 들어오면 중심을 이루는 건물은 정의당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민도리 팔작지붕이며 ‘정의당(正義堂)’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덕봉서원의 특이한 것은 동재 바깥쪽에 오두인의 충신정려와 오두인의 아들인 오관주의 효자정려가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당시 정권이 두 번 바뀌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장희빈의 아들 왕자 이윤은 후에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되었지만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조선 제21대 왕이자 숙종과 숙빈 최 씨 사이의 아들로 이금이 후에 영조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