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박련홍의 구천정사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를 침략해서 일으킨 전쟁에 정당성이 있는가. 아무리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권국가의 국민과 정치인이 결정했을 뿐이다. 국제정세가 변하는 것이 불만이라면 러시아는 유럽이나 미국에 따졌어야 한다. 때리기에 좋은 약한 국가라고 생각했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납득이 될 수는 없다. 일본 역시 한반도를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명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면 배를 타고 중국을 공격했어야지 정명가도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워서 한반도를 전쟁의 화마로 밀어 넣어야 할까.
일본이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와 청일전쟁, 러일전쟁, 진주만 공습을 해온 과정을 보면 정당한 적이 없었다. 이미 우위를 점한 후에 그 타당성을 찾는 과정을 거쳤다. 공격하고 나서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경우가 많다.
정당한 명분 없이 일본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일으켰고 준비가 안되어 있는 조선의 한반도를 휩쓸면서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했다. 수군을 통솔했던 이순신으로 인해 병참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일본은 동력을 잃어버렸다. 일본은 명나라와 휴전하면서 강화를 진행하였다. 동시에 바다의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간계를 써서 그를 하옥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게 된다. 준비가 다시 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정유재란이 다시 발발했을 때 고성에서 출생한 신암 박련홍은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는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크게 물리치게 된다. 이곳 창원 구천정사는 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864년에 중건한 재실이다.
창원 구천정사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5칸이며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지붕의 양측에는 1칸 규모의 마루가 부가되어 있고 상부에 눈썹지붕으로 마무리한 형태이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3칸 규모의 대문채인 등용문이 있다. 대문채가 등용문이라는 것도 조금은 새롭다. 등용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의미다.
안으로 들어오자 예전에 사용했던 우물이 보인다. 지금도 안에서는 물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원균이 이끌던 삼도수군의 함선을 대부분 수장시킨 후 한산도 수비를 무너뜨린 왜군은 8월 5만 6,000여 명의 군사로 호남 지역의 관문인 남원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예전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말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구천정사다. 마당 안에는 박련홍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구천정사는 건물의 규모가 작지는 않은 곳이었다. 양측에 방이 있고 강당처럼 사용되는 중앙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뒤에는 녹음이 우겨져 있는데 공기가 좋은 곳이다. 창원의 구천정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5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신암 박련홍의 구천정사는 영천강과 영오천이 갈라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서리 760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구천정사기를 보면 시대의 늦고 빠름을 논할 것이 없으며 천하를 회복하는 사람은 이곳 구천정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기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남겨 있다.
강화의 결렬과 이순신이 실각한 후 일어난 정유재란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신암 박련홍과 같은 의병들과 육지에서 진격이 여의치 않았을 때 이순신의 마지막 활약으로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은 이로써 6년 7개월 만에 종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