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인지종(堅忍至終) - 결국 시간이 말해준다.
세트장에 있는 오래된 극장이었지만 15분 정도의 짧은 영화를 시간마다 한 편씩 틀어주고 있어서 드라마 세트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공간이었다. 30여 석에 불과한 극장 좌석은 주말이면 매번 만석이었다. 영화를 보려고 들어온 사람들과 서경사, 박양, 봉수, 재흥, 영화는 평생 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남자 두어 명도 뒤늦게 들어와 뒤에 앉아 있었다.
극장에서는 고전 영화 시민 케인이 상영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젊을 때 열정으로 불평등을 바꾸려고 했지만 권위적 인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쓸쓸하게 막을 내리는지 잘 그려낸 영화였다. 누구나에게 꿈이 있다. 그 꿈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지만 결국 시간은 그 꿈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말해주는 재판관이기도 했다.
영화 속 인물이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지는 이들에게 관심은 없어 보였다. 서경사는 조용하게 검은색 가방을 영사기의 뒤편으로 들고 갔다. 미리 예행연습을 해본 서경사는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간에 고이 잘 모셔두었다. 눈에 뜨이지 않게 열쇠 대신에 짐을 그 앞에 쌓아두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때 서경사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고모였지만 서경사는 전화를 받지 않고 조용하게 나와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봉식아. 바빠? 통화할 수 있어?"
복희는 얼마 전부터 봉식과의 통화가 잦아졌다. 인간 막장으로 간 남편보다 더 진실해 보였지만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그가 안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응, 괜찮아."
"네가 말한 대로 했어. 그리고 가방도 고마워. 엄마 가져다줘서 아마 지금쯤 어디다가 잘 숨겨놓았을 거야."
"그래 재흥이 모르게 잘해야겠지. 너도 이제 인생 살아야지."
"이제 그 남자 생각하지도 않고 살 거야."
"나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나중에 일이 잘되면 다시 연락할게."
"잘 될 거야."
전화를 끊은 봉식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오래되어 보이는 깨진 창문 안으로 손을 짚어넣어서 책을 꺼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그림으로 등장하는 바른생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이었다. 그는 그 책을 가방에 넣고 골목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짧은 영화는 끝이 났다. 사람들은 한 명씩 일어나서 출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서경사는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먼저 일어나 나갔고 잠시 시간을 두고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서 나갔다. 재흥은 주변의 눈치를 보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차마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박양과 봉수도 각기 나와서 드라마 세트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재흥은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남자와 그를 따라온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서경사가 가져온 가방을 먼저 꺼내올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론은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주변을 거닐다가 사람들이 모두 나가면 가장 먼저 꺼내서 움직이기로 결정을 했다. 어색해 보이지 않게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극장 입구를 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처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근대식 건물에 카페가 자리 잡고 있어서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극장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종로 여인숙은 옛날의 숙박문화를 알려주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날은 보수 중이라는 문구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봉수는 서경사나 박양도 의심스러워 보였지만 도박쟁이 재흥과 함께 있는 일행도 수상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서경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경찰차로 돌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도 근무교대를 하고 나서 다시 올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수없이 오가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드라마 세트장의 마감시간이 다가왔다. 마감 30분쯤 전 종로 여인숙에서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수레를 밀고 나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모자와 먼지를 막으려는 듯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산업용 보안경과 산업용 분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남자가 절룩거리며 밀고 가는 수레의 위에는 공사장에서 벽돌이 한가득이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드라마 세트장을 벗어나 벽돌이나 마대, 철근 같은 산업쓰레기가 쌓여 있는 곳에 수레를 세워서 쏟아냈다. 벽돌이 쏟아지고 나자 바닥에 있던 검은색 가방이 툭 떨어졌다. 남자는 장갑을 낀 손으로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가방을 들었다. 가방을 든 남자는 CCTV가 있지 않은 비포장 도로로 걸어갔다. 200여 미터쯤 떨어진 거친 비포장 도로에는 경운기가 한 대 서 있었다. 경운기의 운전석에 탄 남자는 마스크와 보안경을 벗어서 경운기의 뒤에 던졌다. 남자는 봉식이었다. 경운기에 시동을 건 봉식이는 천천히 비포장 도로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드라마 세트장에는 몇 명이 극장에 들어가서 가방을 꺼내 질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누가 그 가방의 주인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바르고 슬기롭게 생활하는 것을 알려주는 책은 분명히 가질 수 있었다. 서경사는 그 사건 이후로 경찰복을 벗게 되었고 재흥은 마을에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박양 역시 마을을 떠났고 봉수는 큰 도시로 가서 삐끼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지막으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