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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2. 2022

여인의 결

지방의 균형적인 발전을 꾀했던 충암 김정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미신이라던가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로 서야 한다. 생각이 바로 선다는 것은 가치관이 정립되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어떤 것이 옳은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대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지금도 한적한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다. 향약에서 향(鄕)은 시골향이고 약(約)은 묶을 약이라는 의미다.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는 것은 하나의 문화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지방자치의 풀뿌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역사교과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향약을 널리 퍼지게 한 사람은 충암 김정이라는 사람이다. 대전 동구 신하동 268-5에 가면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된 김정 선생 묘소 일원이 있다.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는데 1978년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기게 된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서 이곳에 묘를 옮기면서 신도비, 충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별묘, 신해당, 그의 부인의 정려각 등도 함께 이곳에 옮겼다.  

충암 김정은 3세에 할머니 황 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관직에 나가서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배웠던 그는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던 충암 김정은 정국공신 등의 조선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기묘 사회(1519)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도까지 갔지만 결국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로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이 있다. 

향약이라는 것은 결국 조선시대의 통치와 연결이 된다.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화와 행정이 본래 하나로 운영되어 약임(約任)이 일원적이었다. 향약은 우리 사회에 유교적 예속(禮俗) 내지는 미풍양속을 보급·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교육이라는 것의 관점은 자신의 계발도 있지만 생각을 바로 세움에도 연결이 되어 있다. 지방자치가 더 필요한 요즘은 옛날의 문화나 교육제도에서도 좋은 것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충암 김정의 흔적은 일백미 벚꽃코스의 시작점에 있다. 봄에는 화려한 벚꽃길과 가을에는 풍성한 억새와 갈대를 볼 수 있는 명소코스이기도 하다. 

김정의 흔적을 살펴보고 내려오니 대청호반에 꽃과 함께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운 깨달음의 연속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흘러가는 시간이 지나는 대신에 새로운 시각이 더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진정한 삶의 발견은 새로운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다양한 결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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