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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7. 2022

명량의 이순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일어선 구례 통제영

살다 보면 자신이 걸어가야 길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길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아야 하고 읽어야 한다. 자신을 모르는데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알 수 있겠는가. 많은 곳을 돌아다녀보았지만 바닷길이 다르고 산길이 다르며 평야 길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 길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전쟁이나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한산에서 이순신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다의 성이라는 학익진을 만들 정도의 평온한 바다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물길이 제각기 다르고 이곳저곳로 휘몰아치니 진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은 학익진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은 바다에만 있지 않았다. 왜군들의 계략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밀려나 백의종군을 할 때 원균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거제도의 부속섬 칠천량이 보이는 곳에서 대패하였다. 이순신의 바다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렇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이 남아 있었다. 

유성룡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수군을 이끌 사람으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를 선조에게 간곡하게 건의했다.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이곳 전라도 구례에 8월 3일 입성하게 된다. 궤멸된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한다. 이곳에서 그가 결의를 할 때 군관 9명과 병사 6명만이 있었다. 

7월 22일 임명되었지만 그가 교지를 받은 것은 구례에서 8월 3일이었다. 이곳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서 이순신이 쉬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44일간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구례군에서 시작한 조선수군의 재건은 순천시, 보성군을 지나 남아 있는 배들을 보충하면서 장흥과 강진, 해남을 지나갔다. 마지막 목적지로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이 바위는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바위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까지 백의종군을 하였는데 구례에 머물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고 하여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 바위라 불려지고 있다. 


충성을 다하려는데 죄가 이미 이르렀고

효성을 바치려는데 어버이마저 가버렸네

이제야 어서 죽기만 기다려야 할런가

마음을 돌아보니 가슴은 찢어지고 

비조차 내리는데 금오랑은 길 재촉하네

천지에 나 같은 사람 또 어드메 있을꼬

마지막으로 도착했던 장소는 명량을 등에 지고 있었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1597년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기게 된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한 것을 보고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한다. 왜군은 13척뿐이 없는 조선수군을 133척으로 포위하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자 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해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 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게 된다. 이것이 명량대첩이다. 이로 인해 왜군은 서해 진출 길이 막히게 된다. 길은 어떤 상황에서든 때에 따라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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