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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09. 2022

아버지의 죽음

4년 만에 열린 2022 정조 효문화제 

효라는 것은 무엇일까. 효의 색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요즘은 과거의 관점의 효과 무게가 다르다. 유교 관점에서 효는 정말 중요한 가치였다. 왕조국가에서 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효는 통치의 근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효를 저지른 자식에 대한 처벌도 그 어떤 죄보다 무거웠다. 왕조시대가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중요한 사회적 단위였다. 낳은 자식은 그 자체가 가족의 자산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자식을 낳는 것이 가족의 번영에 도움이 되었기에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지금은 0.8명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을 만큼 자식은 더 이상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시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에 부모에 대한 효가 극진했던 왕으로 정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지만 대놓고 그 아들임을 말할 수 없다. 호시탐탐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정치세력들 때문이었다. 정조는 확실하게 힘이 있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눈 밖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노론들에게는 적대적인 모습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한 말은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한 걸음씩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화성시로 옮긴다. 왕릉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에 화성시는 정조 효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의 정조 효문화제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간 융건릉에서 4년 만에 개최한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이곳을 찾아와 본 것은 처음이다. 화성시라는 곳을 처음 가면서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융건릉이다. 조선왕조의 장례행렬인 ‘발인반차’를 시작으로 악귀를 몰아내는 나례 의식, 천장 후 제사를 지내는 ‘천전의’까지 보인 이 문화제에서 능행차는 총 300명의 시민이 참여하며, 8일 서울 창덕궁에서 시작돼 수원 화성행궁을 거쳐 9일 화성 융릉까지 총 43.5㎞ 구간이 재현되었다. 

정조 효문화제의 마지막 날에 비가 내렸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있었다. 정조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흉지에 묻혔던 사도세자를 명당인 화성의 ‘융릉’으로 이장하는 영우원 천장을 거행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저출산은 산업구조의 변화와 가족 구성원의 근본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다. 다출산 시대에는 여러 자식이 한 부모를 모시는 것이 가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명도 안 되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만든 사회 시스템을 모두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도시가 바로 서울이다. 

이곳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1735~1815) 홍 씨가 묻힌 곳이며 건릉은 정조(1776-1800 : 재위, 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 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가 향한 것처럼 백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꼈다. 그렇기에 정약용 같은 실학자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고 있다. 비를 피해 있는 사람들 속으로 이곳에서 정조 때에 제사를 지냈던 그 의례를 지냈던 분들이 보인다.  왕실의 제사인 천전의(遷奠儀)는 하루 전에 충호위는 장례를 지내기 전에 재궁을 놓아두기 위하여 임시로 장막을 쳐서 마련하여 놓은 영장전(靈帳殿)과 정자각의 서쪽에 남향으로 병장(屛帳)을 둘러친다. 그리고 남쪽에 유문(帷門)을 둔 길유궁(吉帷宮)을 현궁의 서쪽으로 남향되게 배설한다. 

2022 정조 효문화제에서는 조선왕조의 장례 행렬인 ‘발인반차’를 시작으로 악귀를 몰아내는 나례의식, 천장 후 제사를 지내는 ‘천전의’까지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렸던 공연을 보면서 정조는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모든 냇물에 골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의미의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정조의 서재에 걸려 있었던 것처럼 나이가 듬이 현명해지고 그 지혜가 널리 퍼질 수 있는 고귀한 사람이 될 때 효라는 것은 바로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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