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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Nov 18. 2022

성곽도시 웅천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렀던 창원 웅천읍성(昌原 熊川邑城)

1592년 바다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진 부산의 땅에 군대를 이끌고 처음 발을 내디딘 사람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장 두터운 신입을 받았으며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땅을 밟은 것이다. 부산진성을 시작으로 다대포성, 동래성과 평양성을 함락하며 파죽지세로 땅을 휩쓸고 올라간다. 

전선을 넓혀나가던 왜장 고니시는 육로는 물론 해로로 안골포·마산·가덕도·거제도와 연락이 용이하여 왜군이 본국으로 철군할 경우에도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도 진을 쳤다. 바로 창원의 웅천읍성이다. 현재는 성의 동벽과 서벽만, 동문터, 서문터와 함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동문터의 너비는 4m에 이른다. 

웅천 역사 둘레길 코스의 중심지이기도 한 웅천읍성은 2011년 동문인 견룡루와 동측 성벽과 남측 성벽 일부가 복원되었다. 1974년 12월 경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웅천읍성은 전체 면적 2만 8천800㎡, 둘레 1천64m, 해자 1천300m 규모로 세종대왕의 명으로 쌓은 성 가운데 중요한 유적이다.

복원되기도 했지만 남해안에 자리한 읍성의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직접 보면 알겠지만 완성도가 있는 데다가 해자가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읍성 중 하나다. 고니시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일본인들이 불법 이주를 하면서 살기도 했으며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일시 함락되기도 했었다. 

성벽의 축조수법은 흙을 ‘ㄴ’ 자 모양으로 반반하고 고르게 다지고, 10cm 두께의 점토와 내벽 쪽 1.6m 정도까지 축구공만 한 크기의 돌을 3단 정도 깐 후 그 위에 두께 20cm 내외의 판돌로 된 지대석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남해에는 조선군과 왜군의 충돌이 치열했기 때문에 도시들에는 왜성 형태를 띤 읍성들이 여러 곳이 남아 있다.  

역사는 결국 우리 삶과 밀접한 이야기들이다. 시간이 지나 법이 바뀌고 관점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잘 살기 위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원 성벽의 석축 내벽이 계단 모양으로 조성되어가다가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덧붙여 쌓은 내벽은 수직 되게 쌓은 점에서 이 시기에 내벽을 쌓는 수법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웅천읍성은 진해에 왔다면 꼭 방문해보는 것이 좋다. 긴 전쟁 기간 동안 이곳에서 삶을 영위했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웅천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수군의 진이었던 안골포진이 있다. 왜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던 안골포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1592년 7월 10일 한산대첩 이후 진해 안골포에 남아 있던 왜선 주력대 42척을 격멸한 안골포 해전이 벌어진다. 

웅천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두 곳은 창원의 웅천과 보령의 웅천이다. 바다와 면해 있으며 왜구들의 침략이 잦았던 두 곳 모두 읍성이 있는데 보령에는 남포읍성이며 창원에는 웅천읍성이다. 

웅천읍성은 의외의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하는 곳이랄까. 아침 일찍 이곳에 와서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이곳에 진을 쳤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7년 히데요시가 죽자 귀국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막기 위해 1600년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도 나섰으나 실패로 끝난 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592년 동래읍성에서 송상현 장군에게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라고 말했던 고니시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송상현은 그의 말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 주기는 어렵다.'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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