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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1. 2023

나(我) 란.

장국영 사랑했던 자신을 던졌던 사람.

자신이라는 대상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이라는 존재 역시 몸을 이루는 원소로 구분해 보면 그다지 신비롭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들이 만들어졌다가 흩어질 때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몸에 생각이라는 것이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로 나는 我(아)로 표현한다. 나를 표시하며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하다. 즉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나를 이야기할 때 사랑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란 존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나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대우를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비교우위 같은 것도 아니고 성별우위 같은 것도 아니다. 나란 사람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끊임없이 무언가에 휩쓸려가듯이 생각의 파도에 왔다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런 나를 찾지 못할 정도로 먼 곳으로 다른 힘의 파도가 밀고 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중국영화가 그런 인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홍콩이 중국에 반환이 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때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중에 장국영이 있다. 2003년 사랑했던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장국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밀려가게 만들었던 언론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장국영이 출연했던 영화 중에 영웅본색 같은 영화보다는 천녀유혼이나 종횡사해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채워 넣어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확인되지도 않는 온갖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장국영은 파파라치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파파라치들은 스토킹 하듯이 사진을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알리는 것을 넘어서 온갖 거짓으로 장국영의 이미지를 추락시켰다.


높은 산을 올라가서 라면을 끓여먹으면 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는다. 라면이 익지 않는 이유는 대기압이 적어져서 라면이 익을만한 온도가 되지 않았는데도 물이 끓기 때문이다. 사람이 우주복을 입지 않은채 대기압이 거의 없는 우주로 나가게 된다면 사람의 체온인 36.5도만으로 사람의 몸에 있는 수분은 순간적으로 끓듯이(물론 공기도 없고 온도도 얼어죽을만큼 충분히 낮다.) 기화가 되어버려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압박의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한계를 넘어가면 끓어버려서 기화하듯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 장국영은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기 몇 년 전에 직접 작곡한 나(我)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 첫 구절에 '난 영원히 이런 날 사랑할 테야'가 나온다. 나를 흔드는 수많은 언론과 기사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그의 모습이 교차된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만우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으며 확인되지 많은 이야기가 난무했었다.


나라는 불꽃의 색은 하나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빨간색으로 시간이 지나면 푸른색이 되기도 하고 희미해지는 짙은 갈색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나가 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그 색을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그런 색은 나올 수가 없다면서 말이다. 어떤 색이 되든지 간에 그 색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세상에 나는 가장 처음이며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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