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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25. 2023

7년간의 기록

임진왜란을 고스란히 겪어낸 정기룡의 발자국

평균수명이 늘어난 지금도 100년이라는 시간이 매우 긴 시간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국가의 명운을 달리하는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1,400년대 후반 일본은 많은 유럽상인들이 찾아오며 많은 문물을 거래하게 된다. 무기에서부터 기술과 각종 상거래가 왕성할 때 조선은 성종의 치세아래에 있었다. 사림파가 등용되었으나 훈구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며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이어지며 국정은 분열되고 국방체계는 점차 붕괴되고 있었다. 

1,400년대 후반에서 1,500년대 후반까지 100여 년을 조선과 일본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봉건국가에서 비약적인 변화를 겪게 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국가를 만들기에 이른다. 벚꽃이 지고 나서 빨간색의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흑룡의 해(그러고 보니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다)라는 임진년의 5월 23일 조선에 일본군 선봉대가 착륙하게 된다. 그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이곳은 하동에 자리한 정기룡장군을 모시는 공간이다. 정기룡장군은 육상에서 왜군을 막아낸 장군이며 상주와 하동에 그 흔적을 기리고 있다. 정유재란에서 '60전 60승 신화'를 기록하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하동 인물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음력 4월 24일 하동군 금남면 중촌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622년 2월 28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 중 통제영 진중에서 순국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이곳 정기룡장군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나가본다. 생가터에 초가집으로 만든 생가가 있고 이곳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은 곤양 정 씨의 시조다.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조선 땅은 화마에 휩싸였다. 전쟁 전에 170만 결에 이르던 조선의 경지 면적은 전쟁 후에는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정기룡장군은 무과를 준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가 6년 전인 1586년 25세의 나이에 무과 별시에 급제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 전쟁 중의 공적을 세운 이들에 대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책봉이 이뤄졌는데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게 된다. 

코로나19로 이해 제약받은 삶을 3년 동안을 보냈다. 일상은 어느 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많은 것이 제약받지는 않았다. 7년 동안 자신의 생업이 모두 없어져버리고 살기 위해 어딘가로 숨어야 한다면 어떠했을까.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이라는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나서 초반 거창과 신창, 추풍령에서는 경상도 방어사 조경과 돌격장 정기룡이 패전하였으나 그해 11월 말에 상주에서 상주가판관으로 승리, 함창에서 상주판관으로 승리, 임진왜란 말기에 상주목사로 고령지역을 수복하는 등 많은 활약을 보였다. 

정기룡 장군의 초명은 무수(茂壽).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다.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해서 죽게 된 신립과도 인연이 있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 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이곳 유허지는 1984년 경충당을 옮겨지었으며 신도비와 관리사를 세우고, 1988년에는 기념관을 신축하여 유물을 취합,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정기룡 장군의 유품은 교서, 장검, 유서 등 3점이 있으며 그동안 정 씨 문중에서 장군의 유품을 보관해 오던 중 1989년 하동 경충사 기념관이 준공됨에 따라 이곳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 · 전시하고 있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큰 변화는 한번에 오지 않는다. 이미 어떤 방향으로든지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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