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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9. 2023

선화 is 서동

백제시대의 양식으로 만든 무덤 익산 쌍릉 

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나 다 아는 의자왕이다. 의자왕이 살았던 시대는 국제교류의 타임라인이 지금처럼 빠르게 돌아가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때이기도 하다. 의자왕의 패착은 중국의 변화를 면밀히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의자왕이 머물렀던 수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부여지만 익산이라는 도시는 어떤 역할을 했을지 알려진 것이 많지가 않다.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은 백제를 다시 부흥의 발판을 만들어놓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전에는 이리라고 불렀고 지금은 익산이라고 알려진 도시에 도읍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익산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분하지만 무왕과 선화공주라고 알려진 익산의 쌍릉이 있다. 남향인 두 무덤은 외방(單室0의 판석식 돌방무덤(板石式石室墳)으로 묘실의 네 벽과 바닥, 천장이 모두 잘 다듬어진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되었으며, 널길(羨道)은 널방(玄室) 남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되는 것이 소왕묘와 대왕묘의 특징이다. 

이 무덤은 소왕묘로 봉분의 지름이 24m, 높이 3.5m이며 지하에 설치된 돌방 바닥에서 봉분정상부까지의 높이는 5.5m이며 널방의 길이는 3.2m, 너비 1.3m, 높이 1.7m이다.  두 무덤은 백제 말기인 7세기의 판석식 돌방무덤인 점과 부근에 백제 무왕(武王) 때 창건된 미륵사지가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백제 무왕과 그 왕비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양 무덤의 간격은 약 500여 미터다. 보통 왕과 왕비는 합장묘를 쓰는데 따로 무덤을 썼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2017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가 대왕릉에서 발굴된 인골을 다양한 기법으로 조사한 결과 60대 전후 남성 노인의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사망시점은 620년에서 659년이니 시기상으로만 본다면 백제 무왕과 일치한다. 

소왕릉에서 소나무 숲길을 통해서 올라가면 대왕릉이 나온다. 이곳에서 발견된 널(木棺)은 조사 당시 대부분이 썩은 채 뚜껑 관고리의 8 엽연꽃형장식 밑동쇠를 비롯한 금속제 장식물과 목재 일부만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현재 복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왕릉과 소왕릉을 구분한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대왕릉으로 걸어서 가본다. 왕릉을 만든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왕이 죽은 후 잠들게 될 나무 널은 고급 목재와 화려한 금속공예가 적용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왕릉들은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경우가 많다. 이 대왕릉 역시 일제강점기에 옥제장구, 금동좌금구, 유문목제등이 출초되었고 소왕릉에서도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는 익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살다 보면 정확한 것이 필요할 때가 있고 부정확해도 스토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도 있다. 북쪽의 것을 ‘대왕묘’, 남쪽의 것을 ‘소왕묘’라 하는데, 기준왕릉(箕準王陵) 또는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는 전설도 있다. 

왕릉은 보통 무덤군을 이루는 경우가 많이 있다. 경주에도 그렇고 부여도 그렇지만 이렇게 무덤이 홀로 떨어져 있는 경우는 공주의 무령왕릉 같은 케이스가 있다. 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무덤을 통하여 경제력을 과시한 것도 사실이다.  대왕릉은 무령왕릉처럼 지석이 발견되어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뼈에 대한 분석과 문헌 및 고고학적 정황들을 종합했을 때 무왕을 빼면 사실상 비정할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무왕이 있다면 선화공주도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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