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란 원호

단종을 사모하며 평생 원주에 은거하며 살다.

무분별하게 무언가를 흡수한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에 대한 관점이나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말하면서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자던 태종 이방원의 말도 설득력이 있으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정몽주의 말도 설득력이 있다. 먼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개개인의 영역이다. 그렇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춰 평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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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 정몽주의 대화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것이 바로 세조와 사육신, 생육신들이다. 이 씨 왕조를 열려고 했다는 것과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것은 비슷한 맥락 속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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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본관이 원주이며 원주에서 살았던 관란 원호의 묘역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자식에게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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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냈으며,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던 원호는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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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의 묘를 찾아가 본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부르고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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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조에 의해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추후에 조카인 판서 원효연(元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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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올해 강원도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가 가결되어 도 지정 문화재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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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 선생의 공적들이 사료적으로 고증됐으며, 상돌 등 묘역 일대 석물들이 전형적 조선 전기 양식(형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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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집안의 어른이 세상을 떠나면서 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결국 모든 것이 순환되듯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주에 모역이 있지만 이제는 수목장이나 바다에 뿌려 순환의 의미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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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란 원호가 세상을 떠난 후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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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록은 이렇게 무덤이나 생육신으로서의 행적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손자인 원숙강(元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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