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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5. 2023

관란 원호

단종을 사모하며 평생 원주에 은거하며 살다. 

무분별하게 무언가를 흡수한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에 대한 관점이나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말하면서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자던 태종 이방원의 말도 설득력이 있으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정몽주의 말도 설득력이 있다. 먼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개개인의 영역이다. 그렇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춰 평가할 뿐이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대화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것이 바로 세조와 사육신, 생육신들이다. 이 씨 왕조를 열려고 했다는 것과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것은 비슷한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이곳은 본관이 원주이며 원주에서 살았던 관란 원호의 묘역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자식에게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1423년(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냈으며,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던 원호는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게 된다. 

살다 보니 참 많은 사람들의 묘를 찾아가 본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부르고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결국 세조에 의해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추후에 조카인 판서 원효연(元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이곳은 올해 강원도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가 가결되어 도 지정 문화재가 될 예정이다. 

원호 선생의 공적들이 사료적으로 고증됐으며, 상돌 등 묘역 일대 석물들이 전형적 조선 전기 양식(형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최근 집안의 어른이 세상을 떠나면서 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결국 모든 것이 순환되듯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주에 모역이 있지만 이제는 수목장이나 바다에 뿌려 순환의 의미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어가고 있다. 

관란 원호가 세상을 떠난 후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의 기록은 이렇게 무덤이나 생육신으로서의 행적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손자인 원숙강(元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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