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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5. 2023

정읍의 아카이브

무더위에 찾은 고통의 시대를 담은 정읍 근대역사관

힘을 가진 세력들이 원래 있었던 질서를 흔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갖아 쉬운 방법은 기존의 질서제도를 모두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개성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고려시대를 막 내린 것은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을 하고 모든 토지를 다시 왕실에서 강제로 빼앗은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땅은 오랜 시간 지대와 생산력을 담보하는 대상이며 지금도 유효하다. 모든 토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큰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더울 때 야외활동을 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과 가까운 계곡이나 실내수영장 혹은 실내시설을 찾아다닌다. 여름맞이로 정읍의 아카이브가 있는 정읍근대역사관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나 평온한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정읍 화호리라는 지역은 정읍, 김제, 부안으로 연결되는 교통 요지로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경쟁적으로 화호리로 진출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의 고통은 더욱더 심각해졌다. 

지금도 정읍의 화호리에 가면 일본인들의 상가 밀집지역 었던 곳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일본인들은 화호리에 막 들어올 무렵 조선인들은 한반도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며 땅을 헐값에 팔기도 했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온 일제는 토지소유와 지세제도의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토지 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이때 신고하지 않은 모든 토지는 물론 당시 남아 있던 공공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산림, 초원 등이 모두 조선총동부의 소유가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땅을 소유했던 모든 것을 흔들어버렸다. 그 유명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이 대표로 되어 있는 농업회사등에 헐값으로 판매하였고 일본인 지주들이 걷는 소작료와 운영비, 비료값으로 열심히 일해도 계속 빛을 더 지게 되는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해지게 되었다. 

당시 농민들의 생활을 쉽게 예로 들면 사채를 달러 빛으로 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100만 원을 빌릴 때 3개월 만에 갚는 것을 계약으로 하고 월 10% 이자를 선이자로 떼고 주면 70만 원이 쥐어진다. 3개월이 되었을 때 100만 원을 갚지 못한다면 다시 선이자를 떼고 50만 원 중 30만 원을 주는 방법과 함께 이자에 이자가 더해지면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정읍의 아카이브 센터에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진과 거리모습이 남아 있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한국에 와서 일약 지주가 된 일본인들은 식산은행에서 저리 융자를 받아 고리대금업으로 농토를 늘려나갔다고 한다. 힘겨운 시기 이곳에 희망을 심은 인물은 이영춘(1903~1980) 선생이다. 그는 일제 수탈로 고통당하는 한국 소작농의 치료에 일생을 바친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라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정읍 화호리는 일제강점기 수탈 역사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신태인읍 화호리는 마을 곳곳에 일제시기 시설물과 현 거주민들의 건물이 혼재되어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당시 지어진 건물은 일본인 가옥이나 별장, 창고, 사무실, 합숙소 등이다.

지역의 아픈 역사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되돌아보는 그 역사에서 미래를 찾아볼 수가 있다. 지대 추구 세력으로부터 경제를 해방한다는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목표가 실현되지 못하고 금융자본주의가 대신 출현하기도 했다. 

제국주의에 의해 한국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문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정읍의 명소로 9곳이 있는데 내장산 단풍터널, 옥정호 구절초 지방정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공원, 무성서원과 상춘공원, 백제가요 정읍사문화공원, 피향정연꽃, 정읍천 벚꽃 길, 정읍쌍화차거리, 백정기의사 기념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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