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비추는 통영의 당포항과 성지길에서
전란이 끝이 나고 평화로운 바다의 모습이 통제영이 자리한 통영에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에 일본의 권력을 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로 파견했던 무역상선이 나가사키 항으로 귀항하던 중에 풍랑에 표류하다가 통영의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운 아름다운 통영의 당포는 그 자체로 풍광이 멋들어진 곳이었다. 일본의 바다와 다른 풍경의 통영의 앞다바에 찾아온 무역선에는 포르투갈인도 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찾아온 서양 최초의 도래인이었다. 그 해가 1604년 통영의 당포다.
통영의 당포항에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섬은 통영 욕지도다. 수목이 울창하고 온갖 약초가 뒤엉킨 골짜기마다 사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녹도(鹿島)라고 불리고 있는 욕지도는 욕지항 안에 작은 섬이 거북이 모양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욕지(浴地)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녁노을이 지고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1박을 해야 한다. 욕지도는 통영과는 정기여객선이 운항하며, 교육기관으로는 원량초등학교와 욕지중학교가 있다. 욕지도에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데 통영으로 오기 전에 바다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이기도 때문이다.
욕지도를 오가는 배의 규모는 작지가 않다. 욕지도는 섬 발전 특성화서업의 대상지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경남도는 우리나라 근대어촌의 발상지인 좌부랑개 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살려 골목 내 유휴 상가 리모델링, 근대어촌 발상지 테마 활용, 욕지도 특산품 특화사업 개발 등을 통해 섬 주민 소득 창출과 청년인구 유입을 도모하고 있다.
당포항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면 당포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당포항은 통영과 거제의 사이에 흐르는 견내량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은 견내량에 진을 친 적군의 압도적 전력에 술렁이는 부하들에게 싸움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주문하면서 “죽지 마라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라는 말을 하며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란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인을 테우고 이 땅에 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성격의 인물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권력을 잡았으며 평화를 유지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동서 북쪽의 문루지는 잘 남아 있으며 문지에는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있는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당포성의 남아 있는 석축의 길이는 752m, 최고 높이 2.7m, 너비 4.5m로 통제영이 이곳을 요충지로 사용할 때 만호(萬戶 : 武班 從四品의 벼슬)가 이곳을 관장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 소속의 신여량 장군은 이곳에서 무역 상선을 보았다. 조선 수군은 투항을 요구했지만 무역선이 일본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이 났지만 일본과의 평화협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무역선은 격침되었으며 생포된 사람은 일본인 32명(여인 1명 포함), 중국인 16명, 포르투갈인으로 2명이었는데 한 명은 노예였던 흑인이었으며 다른 한 명이 무역상 주앙 멘데스(Joan Mendes)였다. 통제영에서 심문을 받고 한양으로 압송이 된 후에 당시 중국(명나라)으로 압송되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이면서 통영의 당포항의 바다를 물들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강한 것보다 약한 것에서, 풍부한 것보다 여린 것에서 가진 것보다 없는 것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불꽃처럼 노을이 만드는 붉게 흩뿌려지는 색상이 성벽과 세상을 다른 색으로 만들고 있었다.
당포항에는 최초의 서양 도래인이라는 주앙 멘데스 기념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포르투갈 조각가 빌즈가 남녀 한 쌍의 조형물을 제작하였는데 한국인 여성상은 포르투갈 리스본 공원에 있으며 포르투갈 남성상은 바로 이곳에 세워져 있다. 서양 최초의 도래인이라는 주앙 멘데스가 1604년에 오고 난 후에 한국이름 박연으로 불린 얀스 벨레브레가 네덜란드에서 왔으며 하멜표류기를 쓴 하멜은 동인도주식회사의 소속으로 네덜란드인은 1653년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