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 씨의 친정집안 농은 홍유한의 봉화 우곡성지
18세기부터 성리학으로 더 이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으며 유학의 이념은 조선을 지탱하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는 서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서양학문과 함께 들어왔다. 유자들만이 선비가 되고 지배계층이 될 수 있었던 그때에 다른 학문에 눈을 뜬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의 세자빈이 된 혜경궁 홍 씨보다 9년 먼저 풍산 홍 씨 집안에서 홍유한이 태어난다.
이곳은 봉화군 봉성면 문수산으로 우곡성지가 자리한 곳이다. 혜경궁 홍 씨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달리 자신의 길을 걸으면서 천주교 수계 생활을 했다. 한국 최초의 수덕자이기도 한 농은 홍유한은 왕가의 사돈이며 명문가였던 집안을 뒤로하고 산골로 내려가 책에서 읽는 내용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우곡 홍유한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칠극이라고 하는 것은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란, 나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어놓은 책이라고 한다. 그는 세례조차 몰랐지만 칠극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이 땅에 천주교가 정식으로 들어온 것은 1784년이었다. 60세에 홍유한이 세상을 떠난 것이 1785년이니 그는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책에서 스스로 깨친 뒤에 그대로 살았던 것이다. 그 후손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이미 정해진 길이었을 것이다. 후손 중 18명이 한국 천주교 순교 성인 반열에 올랐다.
돌림자로 본다면 혜경궁 홍 씨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일 것이다. 홍봉한, 홍인한과 동시대를 살았다.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난 소년은 영특해 8∼9세에 벌써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홍 군은 입지(立志)가 확고하고 공부가 독실해 옛사람 가운데도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 성호이익
천천히 걸어서 주변을 돌아본다. 아늑한 느낌이 드는 성지가 우곡성지다. 1603년 예수회 중국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가 저술한 한문 번역서 천주실의에서는 중국인은 유학과 불교, 도교를 논하고 서양인은 중국 유학의 고전을 들어 스콜라 철학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은 본인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홍유한은 학문에서 어떤 것을 보았을까.
이곳은 동양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천주교가 이 땅에 안착하기 전에 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농은 이 서학에서 발견해 스스로를 다스린 계명이 이곳에 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 건너편 큰 바위에는 차례로 글귀를 새겨두었다.
칠극은 겸손으로 오만함을 이겨냄, 사랑으로 시기와 질투를 이겨 냄, 인내심으로 분노를 이겨 냄, 정결로 음욕을 이겨 냄, 베푸는 마음으로 인색함을 이겨 냄, 담박한 생활로 탐욕을 이겨 냄, 부지런함으로 게으름을 이겨 냄등이다.
책에서 깨우친 대로 천주교도인의 삶을 살았던 홍유한의 사후에 혜경궁 홍 씨는 아들 순조를 통해 실권을 쥐고 나서 천주교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다. 홍유한의 조카인 홍낙민은 1784년 세례를 받은 뒤 정조와 주위의 강권으로 배교도 했지만 1801년 신유박해 시기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그의 아들 홍재영은 기해박해 순교자며, 이어 손자 홍병주·홍영주 등 4대에 걸쳐 9명이 순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