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의 죽음

진천 초평면 수의마을에 자리한 금성대군 사우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청주에 자리한 초정행궁으로 쉬기 위해 가고 단종은 숙부인 금성대군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 금성대군은 단종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금성대군은 큰 형이었던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매우 아꼈었던 것 같다. 금성대군은 경상북도 영주시의 금성대군 신단에 신격화되어 모셔지고 있는데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조선의 왕족을 인신(人神)으로 모신 굉장히 드문 사례라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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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에도 전주이 씨 금성대군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 있다. 금성대군은 영주에 머물러 있다가 죽었는데 그래서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금성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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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 씨 금성대군파는 문중에서 금성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이곳에 만들어두었다. 금성대군사우가 이곳에 있으며 그 후손들도 있다. 먼저 세조에 의해 안평대군은 그 후손들까지 모두 몰살되어 후손을 잇지 못했지만 금성대군은 다행히 관노로 전락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가 이후 복권되어 대를 이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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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금성대군사당(鎭川 錦城大君 祠堂)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에 있는 사당이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1426∼145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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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안쪽에 걸어서 올라가면 금성대군 사우가 나온다. 1740년에 사우를 창건하고 금성대군을 배향했고, 1974년에 보수하였다. 앞면 3칸, 옆칸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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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미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세조는 자신의 욕망을 본격적으로 실행한다. '정난'은 政亂(정계의 혼란)이 아닌 靖難(난리를 안정시킴)인데 이때 단종의 주변을 모두 정리한다. 그 이후로 모반 혐의로 경기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광주로 이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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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의 금성대군 사우는 그의 충절을 기린 사우다.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하려던 운동이 실패하자 연루되어 순흥부(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안치되게 된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했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풍기군수의 고변으로 좌절되어 사약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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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을 때 죽기 전에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라고 하며 한양(현재의 서울특별시)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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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되었으며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도 없다. 시신도 찾을 수 없었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의 배식단(配食壇)에도 배향되어 있으며 이렇게 진천군에도 후손에 의해 그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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