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대덕구 미호동의 이야기
대부분의 농사가 마무리가 되었다.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바쁘겠지만 벼수확을 모두 끝낸 농가들은 내년을 준비하면서 쉬기도 하고 소일거리를 찾기도 한다. 사람에게 생각보다 중요한 것은 소일거리일 수가 있다. 큰 일들은 바로 눈에 보이고 노력이 많이 들어가지만 모두 처리하고 나면 빈 공간이 클 수밖에 없다. 노후에 더 중요하게 될 소일거리는 교류하고 스스로를 즐겁게 만들며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한 해의 농사를 끝낸 사람들처럼 한 해를 열심히 보낸 사람들은 11월부터 12월은 무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기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기도 하지만 허망해지는 느낌도 함께 든다. 올해는 예상만큼 잘한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대전 대덕구 신탄진에 자리한 미호동은 대청호반까지 이어지는 길에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고려시대 석곽묘 3기, 조선시대 분묘 3기·구상유구 1기·석렬 유구 1기를 포함한 총 8기의 유구가 조사되었을 만큼 오랜 시간 전에 사람들이 살기도 했던 곳이다.
기원전 10세기 전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로 금강 유역 일대에서 다수 확인되는 유형이며 농경과 어로 생활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되었던 곳이어서 주거입지상으로 좋았던 곳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소설 쓰기 좋다는 절기 소설이 지나고 미호동의 풍경을 보기 위해 찾아가 보았다. 행복한 여가생활은 일과 여가, 현재와 미래를 균형 있게 조정하는데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과거는 과거고 이제 어떤 일을 소일거리로 찾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벼 수확이 끝내고 난 논이 보인다. 옛날에는 벼수확이 끝낸 논에 물을 대서 썰매를 탈 수 있도록 만들어두기도 했는데 그때는 것이 유일한 겨울스포츠이기도 했었다. 네모 반듯하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져 구불구불하게 생긴 논. 그래서 발도 빠지고 기계도 빠지고 벼가 많이 엎치는 논이 미호동의 논이다.
미호동에 가장 대표적인 정자로 취백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조 때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미호 서원은 “숙종 43년 정유(1717)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이름은 송규렴, 호는 제월당으로 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희’ 공이다.”라고 적고 있다.
계절의 온도는 매년 달라지는 듯하다. 기후변화의 원인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모양과 결을 가진 우리의 모습, 빛나는 시절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인 시기에 따라 계절의 온도를 달라지게 될 것이다.
걸어서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옆에 작은 길이 나있다. 취백정에 지금은 없어진 현판 ‘사호각(四皓閣)’도 (영조가 내려준 어필을) 송재희가 자신의 아호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미호라고 하는 지역은 대덕구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너른 금강변이 호수와 같아서 물결무늬 미자와 호수 호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해서 미호 마을로 불렀다. 위쪽으로부터 미호, 회덕, 송촌으로 이어진 공간에는 집성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곳을 지은 송규렴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예조판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그만두었는데, 80세 때에 이르러 지돈녕부사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컫는다.
대덕의 마을과 사람 그리고 문화재라는 도서에서는 옥류각과 동춘당, 정려각(고흥류 씨, 이시직공, 은진송 씨), 송애당, 쌍청당, 어사홍원모영세불망비, 회덕향교, 돌장승(법동, 뒷골, 당아래), 계족산성, 취백정 등 대덕구 지역 문화재 10선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품고 사는 마을 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생활 모습도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온도 때문이다. 계절의 순우리말은 철이라고 한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철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계절의 온도에 적합하게 사는 것이 몸이 덜 고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일이 끝나서 소일거리를 찾아야 되는 요즘 잠시 미호동을 거닐고 고택을 탐방해 본다.